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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정 시인 / 호마이카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3.

김태정 시인 / 호마이카상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모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김태정 시인 /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퍼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김태정 시인 / 달마의 뒤란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은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 할머니댁 푸근한 뒤란 때문이리라

 

여덟 남매의 탯줄을 잘랐다는 방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모처럼 나는

피곤한 몸을 부린다

할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저녁은 길고 따뜻해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개밥바라기별이 떴으니

누렁개도 밥 한술 줘야지 뒤란을 돌다

맑은 간장빛 같은 어둠에

나는 가만가만 장독소래기를 덮는다

느리고 나직나직한 할머니의

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

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겠지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어제가 어제 같지 않고

내일이 내일 같지 않고 다만

 

개밥바라기별이 뜨고

간장 된장이 익어가고

누렁이 밥 먹는 소리

천지에 꽉 들어차고

 

(김태정, 들테나부를 생각하는 저역》, 창비, 2004. 55-57년)

 

 


 

 

김태정 시인 / 겨울산

 

 

한시절 붉고 노란 단풍으로

내 마음 끝없이 일렁이게 하더니

끝없이 일렁여 솔미치광이버섯처럼

내가 네 속을 헤매며

네가 내 속을 할퀴며

피 홀리게 하더니

이제 산은 겨울 산이다

더는 먼빛으로도 겨울산이다

 

어느결에 소스라치게 단풍 들어

네 피에 내가 취해 가을이 가고

풍성했던 열애가 가고

이제 우린 겨울산이다

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

추운 애인아

누더기라도 벗어주랴

목도리라도 둘러주랴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 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에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김태정(金兌貞) 시인(1963~2011)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남.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우수」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등단 13년 만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냄. '시만 빼고 다 버렸다'며 전남 해남 근처 미황사라는 절 아래 동네로 내려가 혼자 살다가 2011년 9월 6일 암으로 세상을 떠남 (향년 48세). 그의 영가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