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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동호 시인 / 만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3.

이동호 시인 / 만선

 

 

기차가 닻을 내린다. 어둠이 거칠게 파도치는 레일 너머 불 밝힌 인가가 파닥거린다.  그물을 쳐라.  확성기에서 명령이 떨어진다.

승무원들이  차량 칸칸이 오가고 사람 떼 우왕좌왕 몰린다.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사람들,  몸부림치고 더러는 운명에  순응한 듯 눈을 감는다.  기차의 닻이 올려지고 열 한 냥 기차가 포만감에 헉헉거린다. 기차는 만선(滿船)이다. 차량 칸칸이 몰린 사람들의 몸이 꿈틀거린다.  사람들의 몸 속 바다가 웅성거린다.  기차의 옆구리 속에 끼인 사람들 창 쪽으로 꾸역꾸역 몸 눕힌다.  피곤한 눈빛들이 창 밖 어둠을 그리워한다.  기차가 정박했다.  역사는 거대한 공동어시장, 출구에서는 경매가 한창이다.  검은색 작업복으로 입찰(入札)을 거머쥔 역무원의 흡족한  표정너머 소금 끼 묻은 안개가 몰려든다. 사람들 일렬로 구겨진 대합실 앞에는 비둘기가 갈퀴를 세운다. 역사의 펄럭이는 깃대가 정박한 기차 옆구리의 비린내를 닦는다. 사람들을 나눠 가진 가로등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있다.

 

다층 2004년 여름호

 

 


 

 

이동호 시인 / 비오는 날 저수지 풍경

 

 

 천둥은 하늘이 땅에게 던지는 수수께끼이다. 천둥이 칠 때마다 다급해진 땅의 심장이 벌렁거리고, 땅의 머리라고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흔든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매년 그래왔듯이 저수지 수면을 원탁圓卓으로 하여 수령 50년 이상의 나무들이 모여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나무들, 머리가 지끈거릴 때마다 나무들은 호수의 수면을 그 길고 가는 손바닥으로 탕탕 내리치기도 했다. 신세타령을 하며 가슴이 꺼져라 한숨을 내 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호수의 물결이 술렁이고 오리들은 원인 모를 두려움에 일제히 물 위를 날아올랐다. 그 넓은 저수지, 천둥이 칠 때마다 나무들은 서로의 몸을 더욱 끌어당기고 있다. 금세라도 저수지의 면적이 좁혀질 것만 같다.

 

 


 

 

이동호 시인 / 독서 2

-긴 직유(直喩)로 읽는 풍경

 

 

오늘밤은 우물 속만큼 고요하다

나는 책상 위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은 창 밖 세상을 읽는다

관 뚜껑을 열 듯 창문을 쬐금 열어두었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서 오랜만에 바라보는

'낯선 세상에서'라고 발문해도 좋을 어둠 속에는,

가로등이 하나둘 외로움을 써놓고 있다

낙엽들은 공중을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가로등이 만들어놓은 담벼락 그림자 위에 걸터앉아,

바스락바스락 낡은 생애를 속삭인다

나는 단풍잎처럼 창을 붉힌다

차 불빛이 빠르게 언덕을 날아올라

밤하늘에 별들을 하나둘 박아놓고 지나갈 때에는

언덕 너머 오래된 아파트를 읽을 수 있다

아파트는 아랫동네를 공부하듯 펼쳐놓고

또박또박 발음하는 중이다

아랫마을은 교회 첨탑 군불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십자가에 젖은 눈을 말리고 있다

사람들은 우물 속 누군가가 빠뜨리고 간 낯선 표정으로,

공원의 아기천사가 안고 있는 항아리에서 빗나가

분수에 빠진 백동화 같은 자신의 불운을

부끄럽게 읽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야경을 주렁주렁 매달고 뻗은 비포장 길을 읽는다

길은 좁은 골목 사이로 늘어선 집들의 아킬레스건을

요철요철 건드리며 다음 페이지 같은

가풀막을 숨가쁘게 넘는다

 

 


 

이동호 시인

1966년 경북 김천 출생. 대구대 대학원 국어국문락과 졸업.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제6회 <시산맥상> 대상 수상. 200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난시동인, 다시동인. 현재 신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