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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익진 시인 / 키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6.

정익진 시인 / 키스

 

 

칼날이 번득이는 남자와

아름다운 물고기로 가득한 여자가 입맞춤한다.

잘려나간 물고기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바닷속을 추억한다.

 

(그녀는 미친 염소처럼 웃었다)

(몇 개의 빨대는 남겨두어야겠지요)

(그래서 입술의 힘이 중요하죠)

 

창문이 닫혀있는 남자와

돌멩이를 뱉어내는 여자가

입맞춤한다. 바닥 위에 떨어진 깨진 유리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난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노을)

(유리파편에 찍힌 립스틱 자국)

 

사과와 같은 표정을 짓는 남자와

장미 만발한 얼굴의 여자가 입맞춤한다.

애플로즈 향기가 요동치고

팔랑팔랑 나비가 날아오른다.

 

(혓바닥이 닿을 수 없는 입술이었습니다)

(입안에서 자라는 열매)

(꿰맨 입술의 실밥이 터져버렸어요)

 

 


 

 

정익진 시인 / 넙치

 

 

손바닥의 앞뒤를 뒤집어 본다.

건물이 낮아지고 있다는 생각

 

잠시 바닥에 엎드려 있고 싶다.

 

지붕 위로 눈이 쌓였는지

 

수면 위로 고래가 몸을 세우는지도 모른 채

 

언젠가 당신의 머리 위에 내 손을 얹었을 땐

당신의 얼굴이 납작해져 당황한 적이 있지만

 

그러한 이유로 벽과 벽 사이의

좁은 틈을 잘 빠져나올 수 있었다.

 

눈이 뒤통수에 달린 것 같다.

앞을 보고 있는데 뒤가 더 잘 보인다.

 

내 손바닥 위로 당신의 손바닥이 서서히 겹쳐지는 일은

미술의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

생활이 두터워지는 일이다.

 

가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물 속 바닥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당신,

 

손가락 빳빳하게 힘주어

당신의 등을 쿡, 눌러보는 재미

 

밤새도록 엎드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떨어뜨린

동전을 찾는 중이었다. 아침이다.

 

의자처럼 일어나 공부하고 싶다.

 

저기요, 자세 더 낮추어주실래요.

동쪽이 잘 보이질 않아서요.

 

 


 

 

정익진 시인 / 긴 이름 짧은 이름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보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

 

이렇게 긴 이름을 가진 그녀, 정말 오래 살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리아뇨’*의 아내로…

밀림에서 고생만 하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

 

돌로레스, 넌 일기를 왜 나뭇잎에 새기는지 알 수 없구나.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압도적으로 뛰어날 수 없다면 평범해 지든지.

너의 동생 엔카르나시온을 봐라. 말을 거꾸로 하는 재주가 있어. 그리고

거짓말쟁이 흉내를 얼마나 잘 따라 하는지 앵무새의 혀가 굳어버렸지.

강 건너 오두막에서 점심을 먹고 델 산티시보네 꽃집으로 가, 가서

사크라멘토 세 다발을 사와라. 돈 대신 손톱 하나를 빼주고 와야 해.

삶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란다. 꽃집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주문을 외워야 한다. 에스투피냔, 에스투피냔, 에스투피냔 이렇게 세 번.

우린 사크라멘토의 향기가 있어야 목숨을 유지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지?

집으로 돌아올 때, 아콩카과 山, 천사의 계곡을 찾아 십 년 전 등반 도중

눈 속에 파묻힌 너희들 오빠 오타발로의 시신을 반드시 찾아오도록 해라.

그의 영혼을 달래주어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단다.

 

그러므로,

 

돌로레스… 집중해라 그리고 황금사과를 두꺼비로 변신케 하라.

엔카르나시온… 태양과의 눈싸움에서 지지 말라.

델 산티시보… 히아신스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꽃들도 골고루 섭취하라.

사크라멘토… 입술보다 눈 화장에 더 신경 쓰기 바란다.

에스튜피냔…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문을 열어주지 말아라.

오타발로… 죽었어도 살아나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린다.

 

두얼, 창얼, 칸, 카라, 려원…

結, 淨, 隱… 그리고… 빛으로 충만한 이름 모를 존재들이여…

 

what’s your name? 주어진 이름이 길던 짧던… 모두 오래오래 살기를…

 

*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등장인물.

 

 


 

 

정익진 시인 / 두 마리 치킨

 

 

여러 마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한 마리 가죽인가요, 두 마리 뼈인가요.

 

여러 마리가 하마처럼 짧을 다리를 떨며

오리야 기리야 건널목을 건너갈 때,

 

한두 마리는 그늘에 숨어서

날개를 털며 네 마리 암사슴을 뜯고 있네요.

 

한꺼번에 여러 마리를 뜯으려면

여러 마리 중 가장 말 많은 한두 마리가 필요하죠.

 

비가 그치면 오만 마리쯤 몰려오겠죠.

여러 마리보다 한두 마리의 진실이 정답이겠지요.

 

여러 마리가 한두 마리를 상대하려면

몇 마리가 노래해야 하나요.

 

여러 마리가 두세 마리의 흉내 내며

땅바닥에 비늘을 털어내는 일은

 

서너 마리가 여러 마리를 등에 업고

절벽과 절벽 사이에 놓인 한 가닥 줄 위를

걸어가는 일만큼이나 절묘하죠.

 

그래요, 한두 마리가 여러 마리를 상대하려면

여러 마리의 지느러미와 기다란 코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과

 

아득하고 먼 뿔이 필요하지요.

거품맥주가 나왔군요.

 

 


 

 

정익진 시인 / 수련 궁전

 

 

물속의 수련을 보고 있다

주름 잡힌 수면 위에서 소리 없이 떠올라

나를 내려다보는 내 얼굴

수련의 미소를 짓고 있다

착각과 오해가 있었고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내 얼굴에서 커다란 물방울이 떨어져

머리칼을 적신다

수련과 수련은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

얼굴에서 얼굴이 피어나듯 수련은 수련을 낳는다

내 얼굴이 내 뒤에서 나를 쳐다본다

물속에서의 얼굴과 얼굴은 불륜… 백만 번째 실수다

내 얼굴에서 그녀의 얼굴이 떨어진다

물속에 잠겨 있다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얼굴, 얼굴들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표정이다

 

 


 

정익진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97년 계간 《시와 사상》 제1회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구멍의 크기』(천년의시작, 2003)와 『윗몸일으키기』(북인, 2008) 『낙타 코끼리 얼룩말』, 『스캣』,이 있음. 부산작가상 수상. 현재 부산작가회의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