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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구르는 돌은 슬프다

by 파스칼바이런 2022. 6. 11.

김왕노 시인 / 구르는 돌은 슬프다

 

 

구르는 돌은 슬프다.

자리 잡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구르는 돌은 이끼가 돋지 않는다지만 이끼가

푸른 갑옷임을 고궁 담의 이끼를 통해 익히 알려졌다.

 

구르는 돌은 잠들 틈이 없다. 발에 차이는 것이 구르는 돌이다. 돌부리로 스스로 악행을 자청해도 구르지 않으므로 당당한 돌인데 구르는 돌은 굴러 닳아가며 아프다. 돌이 짱돌이 된다. 일생일대의 대전환, 날아가 요지부동의 방어벽에 부딪쳐 튕겨 나오지만 한 번 쯤은 약자 편에서 약자가 울분으로 있는 힘을 다해 던지면 날아간다는 것, 실어준 힘을 반동삼아 결국 돌아오는 부메랑이 아니라 손을 떠나 날아간다는 것, 어쩌면 버려진다는 것

 

구르는 돌은 모가 닳아 두루뭉술하지만 구르지 않는 돌은 모가 살아있다. 원시인이 돌 끝에 매달아 사냥에 나설 때의 아름다운 날의 기억을 머금은 모가 살아있다. 돌의 모라는 것은 스스로 깨져 가진 날이거나 제 안에 숨긴 날을 내 보이는 것, 구르는 돌도 깨면 모가 살아있으나 구르므로 닳아 작은 돌에서 나온 모라 볼품없다.

 

아버지도 세상에 구르는 돌이었다. 구르며 자식 목구멍에 풀칠한다며 좌로 우로가 아니라 좌익도 우익도 아닌 채 이념도 없이 천지사방으로 굴렀다.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뽑는 다는 말은 말일뿐 아버지는 구르는 슬픈 돌이었다. 구른다는 것은 결국 뿌리가 없다는 것, 꽃 피지 않는다는 것, 잡아야 할 지푸라기도 없다는 것

 

지금도 나는 구르는 돌을 보면 슬프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의지를 잃어버린 돌, 굴러서 남의 장독을 깨뜨릴 것 같은 구르면서 풀을 으깰 것 같은 산 아래로 구르는 돌 같은 돌, 간혹 살다보면 나도 구르는 돌이란 생각이 든다. 살다보니 약삭빠르게 이리저리 뒹구는 돌, 그러나 저녁이면 커다란 눈물 한 방울 같은 돌

 

아무튼 집 없이 구르는 돌은 슬프다. 지상에 불멸의 집 한 채 얻지 못해 이리 저리 구를 너도 나도 이구동성으로 슬프다. 슬플 수밖에 없는 구르는 돌이다. 너도 나도 돌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이별 그 후의 날들』,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이 있음.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등 수상, 2018년 올해의 좋은 시상,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시와 경계》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