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리호 시인 / 양상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6. 11.

리호 시인 / 양상치

 

 

설탕을 다 팔았다

설탕을 다 팔았고

설탕을 다 팔 줄 알았다

 

입속에서 설탕이 줄줄 쏟아졌다

재미있는 말이 녹았다

단맛이 도는 젓가락을 가져왔다

 

바꿔야 하는 것을 찾았다

바꿔야 할 것이 없었다

팔 것을 바꿔야 했다

 

소금을 주문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함박눈이 내린 지 꽤 됐다

소금을 취소했다

눈이 다 녹았다

 

소금을 팔지 못했다

소금을 팔지 못했고

소금을 팔 줄 알았다

눈의 계절은 이따금 온다

 

재설 차의 바퀴 수를 세다가

바퀴를 사지 못했다

바퀴 파는 곳은 멀고 눈은 계속 쌓여갔다

택배기사는 오래도록 잤다

 

팔지 못한 설탕의 이름과 사지 못한 소금의 이름

다 녹은 함박눈의 이름과 택배기사가 놓지 못한 늦잠의 이름

 

또는, 단맛 나는 젓가락을 두드리며 이 시를 소리 내서 읽고 있는 당신의 그 싱싱한 이름

 

《시인시대》2021.겨울호​

 

 


 

 

리호 시인 / 묵향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새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나는 돈키호테, 잡을 수 없다고 하는 저 하늘의 별을 잡는

적도의 펭귄

 

벼루에서 부화시킨 난에 하얀 꽃이 피었다

 

마모된 자리를 찾아 B플랫 음으로 채웠다

 

제 몸 갈아 스민 물에서 서서히 목소리가 자랐다

 

노송을 머리에 꽂고 온 사향노루가 어제와 똑같은 크기의 농도를 껴입고 불찌를 건네는 새벽

 

그늘을 먹고 소리 없이 알을 낳는 스킨다비스 줄기 끝에 햇빛의 발걸음이 멈춘 그 시각 무장해제 된 상태로 소파에 누운 평각의 그녀가

 

봉황을 눈을 깨트리며 날았다

 

익숙한 무채색으로 난을 치듯 아침을 그렸다

 

향 끝에 끌어당긴 비충로 불을 놓으면 곱게 두루마기 걸치는 묵향

 

단테가 잠시 머무르기로 한 지상의 낙원이 검은 호수 속에서 걸어 나왔다

 

 


 

리호 시인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4년 《실천문학》 제3회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제3회 이해조문학상 수상.〈디카시작품상〉 수상. 시집 『기타와 바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