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구르는 돌은 슬프다
구르는 돌은 슬프다. 자리 잡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구르는 돌은 이끼가 돋지 않는다지만 이끼가 푸른 갑옷임을 고궁 담의 이끼를 통해 익히 알려졌다.
구르는 돌은 잠들 틈이 없다. 발에 차이는 것이 구르는 돌이다. 돌부리로 스스로 악행을 자청해도 구르지 않으므로 당당한 돌인데 구르는 돌은 굴러 닳아가며 아프다. 돌이 짱돌이 된다. 일생일대의 대전환, 날아가 요지부동의 방어벽에 부딪쳐 튕겨 나오지만 한 번 쯤은 약자 편에서 약자가 울분으로 있는 힘을 다해 던지면 날아간다는 것, 실어준 힘을 반동삼아 결국 돌아오는 부메랑이 아니라 손을 떠나 날아간다는 것, 어쩌면 버려진다는 것
구르는 돌은 모가 닳아 두루뭉술하지만 구르지 않는 돌은 모가 살아있다. 원시인이 돌 끝에 매달아 사냥에 나설 때의 아름다운 날의 기억을 머금은 모가 살아있다. 돌의 모라는 것은 스스로 깨져 가진 날이거나 제 안에 숨긴 날을 내 보이는 것, 구르는 돌도 깨면 모가 살아있으나 구르므로 닳아 작은 돌에서 나온 모라 볼품없다.
아버지도 세상에 구르는 돌이었다. 구르며 자식 목구멍에 풀칠한다며 좌로 우로가 아니라 좌익도 우익도 아닌 채 이념도 없이 천지사방으로 굴렀다.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뽑는 다는 말은 말일뿐 아버지는 구르는 슬픈 돌이었다. 구른다는 것은 결국 뿌리가 없다는 것, 꽃 피지 않는다는 것, 잡아야 할 지푸라기도 없다는 것
지금도 나는 구르는 돌을 보면 슬프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의지를 잃어버린 돌, 굴러서 남의 장독을 깨뜨릴 것 같은 구르면서 풀을 으깰 것 같은 산 아래로 구르는 돌 같은 돌, 간혹 살다보면 나도 구르는 돌이란 생각이 든다. 살다보니 약삭빠르게 이리저리 뒹구는 돌, 그러나 저녁이면 커다란 눈물 한 방울 같은 돌
아무튼 집 없이 구르는 돌은 슬프다. 지상에 불멸의 집 한 채 얻지 못해 이리 저리 구를 너도 나도 이구동성으로 슬프다. 슬플 수밖에 없는 구르는 돌이다. 너도 나도 돌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서영 시인 / 유채는 눈부시고 노랑은 깊어져요 외 1편 (0) | 2022.06.11 |
---|---|
리호 시인 / 양상치 외 1편 (0) | 2022.06.11 |
김종숙 시인(芝室) / 가을, 그대가 올 차례다 (0) | 2022.06.11 |
임호 시인 / 숲 (0) | 2022.06.11 |
이은옥 시인 / 나리 외 1편 (0) | 2022.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