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덕 시인 / 도마뱀
도마뱀이 도마뱀 그림 속에 들어간다 도마뱀이 그림 속 도마뱀과 만나 살구를 혀로 핥는다 살구에서 봄 햇살이 흘러나온다 봄 햇살에서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림이 물에 젖는다 물에 젖은 그림에서 도마뱀이 허우적거린다 그림 속 도마뱀이 그림 밖으로 기어나온다 도마뱀은 수납장, 가죽 가방을 지나 잠든 그녀 꿈속으로 들어간다 곤충을 잡아먹는다 그녀의 불안이 깊어 간다 도마뱀은 늘 번식을 꿈꾼다 그녀의 안과 밖은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다 도마뱀이 꿈속 구덩이에 빠졌다 기어오르기를 반목하는 동안 화분에는 꽃이 피거나 잎사귀가 부풀어 오른다. 세상에 없는 문장들이 꿈 밖에서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세 아이를 껴안고 죽은 어느 여인의 신문 기사 주변을 곤충들이 날아다닌다 그림자마다 도마뱀 꼬리를 가득하다.
<동시> 권기덕 시인 / 라면
내가 만약 라면이라면
운동할 땐 고릴라라면 춤추고 싶을 땐 캥거루라면 대화가 필요할 땐 앵무새라면 수영하고 싶을 땐 물개라면 협동할 땐 개미라면 여행하고 싶을 땐 제비라면 깜깜한 길 가야 할 땐 올빼미라면 친구 도와주고 싶을 땐 악어새라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라면이 되고 싶다
- 「동시발전소』 (2019년 여름호)
권기덕 시인 / 정글짐
바람집에 갔어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초대해 준 친구가 없어도 들어갈 수 있었죠 창문은 늘 열려 있어 무섭진 않았어요
단지 좁은 방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몸을 굽히거나 눕히며 거인 발소리를 들어야 했죠 방마다 바람의 목소리가 달라 과자 부
스러기를 흘리기도 했구요 거인 발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잡아먹힐지도 모를 불안감에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어요 그때마다
거꾸로 자라는 나무, 불어나는 그림자도 보였죠 바람집을 겨우 빠져나오면 늘 불이 켜지곤 했어요
권기덕 시인 / 여우비
햇볕이 쨍쨍했는데 비가 내렸어
책가방 어깨끈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우산이 활짝 펴졌어
책가방과 내 몸을 우산이 보호해 줬어
우산은 프로펠러가 되어 빙글빙글 돌았어
나는 어느새 공중을 날고 있었어
동네 떡볶이집을 지나 남산타워를 지나 만리장성을 지나
여우를 만나러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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