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숙 시인 / 세치 혀가 길어진다
식물인간 남편의 몸을 그녀가 혀로 일으켜 세우고 있다 종일 쉬지 않고 한 여름의 선풍기처럼 혀가 세상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풀어낸다 쓰러진 갈대를 흔들어 세우는 바람처럼 혀는 구석구석 남자의 몸을 더듬는다 세치 혀가 길어진다 자꾸만 이야기가 길어진다 바람의 길로 말들이 길게 쏟아져 나와 텅 빈 창자의 여린 섬모를 꽃 대궁처럼 일으켜 세운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부드러운 혀끝이 드릴처럼 뼈 속까지 깨우러 들어가는 고단한 하루 단단해지는 혀가, 금방이라도 척추를 일으켜 세울 듯 검붉다
- 우희숙 시집 ‘도시의 쥐’
우희숙 시인 / 아랫니 하나
아랫니 하나 바깥에 있다 여든 해 동안 물어 뜯고 씹고 맷돌처럼 갈며 산 시간이 저리도 고요할 수 있을까 우수수우수수 우수수수 치근이 다 빠져나간 자리마다 침묵들이 단단하게 아물었다 혀가 침묵을 혀가 아랫니를 둥글게 감싸 안는다 목젖을 치받아 오르던 부러진 생니의 드센 기억도 봄날처럼 유순해졌다 묘지의 초라한 묘비처럼 가장자리 모질게 쪼개진 줄도 모르고 아랫니 하나 시간을 꼭 붙들고 서 있다
우희숙 시인 / 빛, 돔구장 안에서
달리는 바람이다 바람에 부러지는 가지다 가지에서 소낙비처럼 떨어지는 버찌다 버찌를 쪼아 먹는 새다 먹다가 시시때때로 우는 뻐꾹새다 울음을 매단 공중이다 울음을 잘라 내는 공중이다 숨죽인 바람이다 바람을 돌돌 말아 똬리를 튼 뱀이다 똬리에 앉아 졸고 있는 개구리다 멍한 눈빛이다 한낮의 잠이다 죽은 용수철이다 걷고 있는 바람이다 씨앗을 문 개미의 행렬이다 죽은 개미를 꽃잎을 물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상여다 꽃술을 들고 상여를 쫓아가는 무당벌레다 뛰는 바람이다 팥 순 먹고 쏜살같이 도망치는 고라니다 고라니의 긴 다리다 긴 목이다 고라니를 쫓아 날뛰는 개다 울부짖는 소리다 사그라지는 소리다 멈춰 버린 바람이다 양철 지붕 위 쉬는 바람이다 감자 캐다 퍼져 버린 너다 땀에 젖은 너의 등짝이다 휜 등짝 아래 까맣게 탄 얼굴이다 알 수 없는 통증이다 흐르지 않는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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