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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민석 시인 / 그리운 명륜여인숙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30.

오민석 시인 / 그리운 명륜여인숙

 

 

 잠 안 오는 밤 누워 명륜여인숙을 생각한다 만취의 이십대에 당신과 함께 몸을 누이던 곳 플라타너스 이파리 뚝뚝 떨어지는 거리를 겁도 없이 지나 명륜여인숙에 들 때 나는 삭풍의 길을 가고 있음을 몰랐네 사랑도 한때는 욕이었음을 그래서 침을 뱉으며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했었지 문학이 지고 철학도 잠든 한밤중 명륜여인숙 30촉 흐린 별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이 나란히 잠든 명륜여인숙 혈관 속으로 알코올이 밤새 유랑할 때 뒤척이는 파도 위로 느닷없이 한파가 몰려오곤 했지 새벽 가로등 눈발에 묻혀갈 때 여인숙을 나오면 한 세상을 접은 듯 유숙의 종소리 멀리서 흩어지고 집 아닌 집을 찾아 우리는 다시 떠났지 푸른 정거장에 지금도 함께 서 있는 당신, 그리고 우리 젊은 날의, 그리운 명륜여인숙

 

 


 

 

오민석 시인 /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누구는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절망을 말하지만

지금 할 일은

참혹한 시간 속으로 더 들어가는 것

애인들은 등을 돌리고

꽃들은 마침내 졌다

지금 할 일은

믿음, 희망, 미래, 이런 단어들을

잠시 버리는 것

더 혹독하게 살의 냄새를 맡은 것

유령들과 작별하고

염통의 지도를 다시 읽는 것

아, 또다시 삶에 속은 자는

지게를 지고 다시 생계를 향해 가네

지금은 더 참혹하게 무너질 때

알몸의 비극과 결혼할 때

손쉬운 작별들과 작별할 때

그러니 벗들,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오민석 시인

1958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경희대학교대학원 영어영문학 박사.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 당선 등단.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 평론활동 시작. 시집으로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운 명륜여인숙』이 있으며, 문학이론서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번역서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이 있음. 현재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