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희 시인 /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희고 느린 꿈을 꾸는 중예요 아마도 이 꿈은 때죽나무 꽃 위에 내릴 것 같아요 한낮이 붉게 차갑다가 밤엔 눈보라같이 뜨거워져요 눈동자에 여행자의 짐을 많이 실어서 실명할거라는데요 물푸레 그네에서 분홍 토끼가 일러주었죠 늙은 괘종시계는 거꾸로 서서 손뼉을 열두 번 쳤고요 난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책 읽는 버릇이 있죠 오늘은 무지개를 싹둑 잘라 책날개에 붙였어요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라는 페이지를 멈춰요
심장을 켜면 음악이 흐르는 노란 시를 쓸 겁니다 언덕 위 벽돌집으로 와서 읽어줄래요? 변덕스런 난 마당가 맨드라미를 닮았대요 난쟁이 할머니가 알려 줬어요 두 가지 꽃이 피는 나무에서 내가 태어났는데 그러니까 내가 우울한 것도 검정양산만 쓰고 다니는 것도 저 복사꽃 때문인 걸요 자꾸만 달아나려는 마음을 긴 손가락으로 움켜잡아요 멀리 가지 못하게 발뒤꿈치를 깎았어요 누군가 밟고 다닌 그림자 같은 나를 깨워줘요 셋 둘 하나 꿈에서 뛰어내려요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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