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시인 / 우주비행
칫솔은 화장실 작은 유리 창틀 위 칫솔꽂이 대용으로 쓰는 컵 속에 몸을 기대어 제가 할 일이 없어지는 늦은 밤이면 캄캄한 철새들의 항로를 바라보며 우주의 먼 곳을 상상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어 라디오에서 흐르던 누리호 발사소식을 들으며 칫솔은 마치 기울어진 제 몸이 함께 일어서는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단지 아주 일시적인 행복이라는 걸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지만 알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칫솔은 거울에 비친 이를 열심히 닦고 있던 이 사람에게 나는 과연 몇 번째 여행일까 궁금해졌어 그걸 나도, 이 사람도 기억할 수 있을까 그렇게 모든 걸 추억한다고 한들 이 캄캄한 밤 작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밤을 비행하는 철새의 날갯짓을 흉내 낸다고 한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어 성실히 하루에 세 번 남겨진 음식찌꺼기들이나 치우며 삶의 의미를 비닐봉지처럼 챙겨보는 것인데 가끔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아무것도 제 존재에 담지 않는 검은 비닐봉투 하나가 텅 빈 노을 너머로 해파리 우주선처럼 아주 천천히 자기 자신을 떠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지 하루에 세 번씩 몸은 젖어갔고 하루에 세 번은 다시 자신을 말려야 하는 그러다가 또 비 맞을 준비를 하는 인간들의 오래된 우산과 같은 삶 또 시간은 낡아갈 테고 머리칼이 갈대처럼 무거워 기울어질 때 우주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의 별똥처럼 이 작은 유리 창틀마저에서도 영영 버려질 것이라 생각했어 버려지고 또 버려지고 영혼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다시 또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태어나 지루한 인내를 여행하는 걸까 우주의 허공은 왜 그리도 텅 빈 넓음인지 보이저는 언제쯤 또 다른 뭍에 다다를지 주인은 가끔 이 세계의 우주비행이 무료할까 봐 화장실 문이며 온갖 창문이며를 다 열어놓고 기타를 쳐준다 그러면 또 기타에게 음악들은 몇 번째로 떠나가는 음악들일 것인가 노래들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칫솔꽂이 대용 작은 컵 속에서 살아가고 늘 혼자였던 옆에 다른 칫솔 하나가 놓인 적도 있었어 함께하는 야간비행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같이 태어난 보이저 1, 2호가 서로 다른 성간의 무한궤도를 흘러가듯이 그러나 때론 그들의 가는 목이 서로에게 기댄 채 온 밤을 말없이 서로의 표정으로 조용히 보낸 적도 있었지 조금씩 젖고 마르고 그런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자그마한 우주선 창밖으로 천천히 그들의 캄캄한 우주를 흘려보내고 있었어 나는 너에게 이 세상 몇 번째 우주일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런 그대가 오늘따라 칫솔의 가는 목을 그러잡고 오래오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어 떠날 때가 되었어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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