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국현 시인 / 1984년, 빵가게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가 문을 닫았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물에 젖은 깻잎 모양 흐느적거리며 귀가할 때 은행 옆 은행나무 맞은편 옛체로 쓰인 하얀 간판 아래 밝은 조명이 환한 진열장 뒤에서 가게를 지키던 중년의 부부가 빵가게 옆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금전출납기 통을 열었다 닫거나 가게 벽면에 달린 태양 장식 시계를 보거나 진열장 속 팔리지 않은 가지런한 빵들을 바라보고 있던. 부산어묵 아주머니는 ‘오래 버텼지’ 했다 슈퍼마켓의 사내도 ‘오래 버텼지’ 했다 대형 체인 바케트가 대로변을 점령한 뒤로 몇 개의 작은 빵집이 들어섰다 사라지고 하던 곳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 주인 남자가 빵 봉지를 내밀며 멋쩍게 말했다 “오늘 두 번째 손님이세요”
제철소 노동자로 세상에서 내 길을 걷기 시작했던 그해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 주인도 어딘가 제과점에서 그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흔들리며 필사적으로 이제까지 왔을 것이다 자정이 다 된 어두운 골목을 휘적휘적 걷는 나처럼
오늘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 은행나무 앞 골목을 지나며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 빈자리를 본다
어딘가에서 환하게 불 밝히고 있기를
비틀거려도 멈추지 않는 걸음으로 찾아가 1984년부터 내가 써온 시 한 줄 읽어주면서 1984년부터 그가 직접 만든 빵을 먹을 수 있기를
-『새벽에 깨어』, 푸른사상사, 2019.
여국현 시인 /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은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넓어지고 끝없이 이해하고 참고 늘 무슨 일에건 웃어줄 수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하다가
한없이 옹졸해지고 좁아지고 끝없이 궁금해하고 혼자 속으로 묻고 자주 사소한 일에 울컥 화를 내기도 하다가 홀로 돌아 앉아 속앓이를 하는 것, 이란 걸 알게 되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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