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하 시인 / 망각 처방전
숲 너머 벼랑이 고고한 척 똬리를 틀었다 숲을 지나는 동안 똬리 풀린 벼랑은 사라지고 길 생기길 바란다고 과연 벼랑이 길을 향해 양보를 내놓을까
우리는 기도한다 돌 틈 약수 바가지로 바닥 긁듯 애타는 한 방울에 그리움 담아 기도한다
시간이 바닥나도록 그리워하면 어쩌면 하늘이 돌려줄지도 몰라 끝에 서면 마주할지도 모르는 일
누군가 붙여놓은 크기 다른 이름을 가진 하루하루 시간이라는 하나가 여러 개의 톱니 물려 돈다
잊고 살아도 흐르는 시간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모자라는 그리움 눈감아 주는 너그러운 시간 속 많은 것을 용서받고
낡은 톱니는 출렁다리를 놓고
김새하 시인 / 시간
내놓은 적 없는 시간이 거리에 누워있다
분리된 것을 의식하지 못한 시간의 주인이 이제야 내놔진 시간을 본다 무두질 당한 가죽을 닮아가는 중이다
시간은 언제 주인을 떠났을까 같이 태어나 함께 하던 시간의 분리 언제부터였는지 삶의 중요한 점점 마다 의심을 한다
헐벗듯 놓인 시간 무심코 일부러 욕심에 밟힌 흉터가 아프게 남는다 한 덩어리 훔치는 도둑 모르는 척 내줘야 한다 잠시 쪼그리고 앉아 괜찮냐 묻고 가는 고마움에 목메어 목매고 싶다
내놓은 시간은 돌아오는 길을 모르고 주인은 가져가는 법을 모른다 내 시간을 바라보는 내가 남처럼 옆에 쪼그려 앉는다
김새하 시인 / 담쟁이
차갑게 돌아선 등이지만 이대로 체념하기 싫어 따뜻한 피돌기에 안간힘을 쓴다 조금도 기울여 주지 않는 냉정함엔 이유가 있겠지 이해의 줄타기를 지속한다
내버려 둬도 될것을 못본 체 못하고 기여이 힘줄 터지도록 용을 쓴다 끝내 굳어진 시멘트 벗겨 낼 수 없을지라도 감내하겠노라며
지나가는 새벽을 잡고 묻는다 어쩌다 인연이 여기로 흘렀을까 머무르는 바람에게도 묻는다 이 찬 인연을 왜 내치지 못했을까
연초록 흐드러진 날에 벌써 피멍 들기 시작할 즈음 묵묵히 담벼락을 잡은 손끝이 숨을 고른다
잠깐만 쉬는 거야
김새하 시인 / 발가락
뒤꿈치로 이사 가는 날부터 뒤로 걷기 시작한다 뼈와 근육들은 진출하려는 행위에 집중했지만 뒤로만 허락되어 가보지 않은 곳에 흔적을 찍을 수 없다
되짚는 발자국 후회를 만나 기쁨이 슬펐다 똑같은 반복, 바꾸지 못할 과거는 처음부터 놓쳤다 어긋난 건반 같은 인생의 지속하는 건널목 윤회 바라는 기도 들어주는 척 신은 지옥을 포장해 보냈다
숙면 전의 고요 문을 분실한 혼(魂)들 정적처럼 움직인다 이불 밖으로 나간 발 잘라가는 귀신이 온다 발가락 잘라간다 무서워 안으로 다리 구기던 시절 지나 조심스럽게 발가락 내민다 뒤꿈치에 붙은 발가락을
발가락 없이 신발에 담길 수 없어 미안함 담아 가지런히 놓는다 발가락 잃어버린 발은 덩어리를 남기고 낯선 땅을 밟는다 기우뚱 낯설어하며 전진한다
김새하 시인 / 보툼리눔
사냥꾼 왕비에게 소인국 비밀을 알려줬다 걸리버가 소인국에 간 이유
왕비가 표류한다 적이다, 창칼 들어 공격하라
꽁꽁 묶어 썩은 소시지 먹이는 것 침입자에 대항하는 소인국 오랜 전통
스텐 갑옷 입고 피부 속으로 기어들면 소시지 먹은 적, 피부 안에 가면을 씌운다
왕비가 백설 공주보다 아름다워지려 할 때 독 사과보다 필요한 건 가면
웃는 가면 버리고 웃음기 마른 가면 쓰면 왕비는 소인국에 집착 생긴다
가면 지키려면 심장은 하늘을 향해야 해 바닥 그리운 심장 엎드려 울 수 없다
간호사 유니폼 하늘에 할랑거리면 가면무도회 나갈 준비 끝
사냥꾼 착각에 빠지고 썩은 소시지 만찬 계속 차려진다
점점 두꺼워지는 가면 무거워 엎어진 왕비의 단단해진 얼굴, 사냥꾼의 굳은살 가득한 손이 감싸 쥔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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