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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진형 시인 / 소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9.

박진형 시인 / 소리

 

 

소리를 얻기 위해 소리를 버린다

 

흩어진 목소리들이 수런대는 카페에서

어제까지 즐겨 듣던 음악이

오늘은 불안한 배경이 되어 바닥에 깔린다

무심히 에도는 음표는 거북한 선율이 되어

커피가 놓인 내 자리를 감돈다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날선 소음은

달팽이관을 서투르게 간질이는 독벌레

바람소리, 파도소리, 종소리가 내 안에서 거칠어질 때

이어폰을 꺼내 귓구멍에 밀어 넣는다

밀봉은 하나의 소리는 닫고

다른 하나는 피어나게 하는 환상의 작업

나는 짧은 들숨을 참으며

침묵의 볼륨을 조금씩 높인다

날카롭고 단단한 주파수가 귀를 두들일 때마다

어긋난 소릿결은 귓불을 파고든다

이어폰은 소리를 열고 닫는 문

세상으로부터 귀를 닫으면

보이지 않는 소리의 이면이 보인다

모든 소리를 밖에 두어야

닫힌 귀뿌리에 소리가 돋는다

소리와 정적은 일란성 쌍둥이일까

몸 밖 음원이 멎을 때

나는 귀를 열고 입을 닫는다

소란과 고요가 교차하는 도시의 계단을 털고

나는 귓속에 갇힌 불협화음을 털어 낸다

 

소리를 보기 위해 소리를 감는다

 

 


 

 

박진형 시인 / 오이도

 

 

가느다란 눈썹이 바닷바람에 흔들린다

까마귀 날갯짓으로 어머니를 부르는 섬

소리는 소리를 부르고

침묵을 묻는다

 

귀울림이 심한 날 오와 이를 소리 내본다

부딪히는 모음이 파도로 밀려오면

그르렁 기침 소리가 방파제에 묶여 있다

 

오와 이 사이 밭은 숨 등줄기를 흔들어도

바람에 닳아가는 모음들만 다가온다

그림자 휘청거린다

움키지 않고 살아온 귀

 

 


 

 

박진형 시인 / 채석강

 

 

남도의 비극이 무르익고 있다

해식동에서 바라보는 노을

타오르는 불길을

누가 누를 수 있을까

 

황금빛 물결 너머로

비틀어진 하루가 지나간다

파식대지 건너

수평선이 울컥 피를 토한다

시린 눈은 이미 젖어 있으나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켜켜이 쌓인 수많은 책들

오랜 퇴적의 역사 그려낼 수 없으니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목판에 새긴 유배의 세월을 지울 수 없다

 

붉은 갯바람 검게 물결치는 변산 앞바다

격포항이 혼자 울고 있다

 

밤이 내려 은빛 달 떠오를 때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수면 위에 비친 달그림자

누가 잡으러 뛰어들 수 있을까

 

어두워진 채석강

파도에 베인 심장이

검은 지층 사이로 겹겹이 스며들고 있다

 

 


 

박진형 시인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학사, 불어불문학과 석사, 불어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1989년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 소설 당선. 2016년 《시에》로 시부문 등단. 201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용인문학회 편집위원, Volume 동인 회장, 시에문학회 부회장, 시란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