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구름의 말을 빌리면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9.

이규리 시인 / 구름의 말을 빌리면

 

 

그 자리에서 왜 나는 도망치고 싶었는지

그런데 왜 도망칠 수 없었는지

사실 알고 있었어요

 

어이없게도

 

화를 내는 사람은 강한 사람일까 허약한 사람일까

따위를 점치는 것으로

견디고 있었어요

 

이런 거 다 구름 이야기죠

구름이 되려다 못된 허무의 이야기죠

 

별자리를 짚어 가다보면

아주 먼 곳을 갈 수 있을 것 같아

갔다 돌아오는 걸 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구름의 말을 빌리면

한결같다는 건 얼마나 많은 함정을 지닌 것인가

 

맞는 말이에요 젠장 나는 사랑한 적이 없어

 

이해해요 그렇죠

구름은

정형이 없어요

 

꽃과 열매를 함께 달고 있는 나무가 있었으니까요

 

(『서정시학』 2021년 가을호)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과 『뒷모습』, 『당신은 첫눈입니까』,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등과 산문집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가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