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형 시인(경주) / 나비 효과
인제 그만 눈을 뜨세요 귀를 닫고 눈을 뜨니 파란 화면이 점멸합니다 몇 번의 클릭을 거쳐 화면 너머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태풍의 눈을 품고 있어요 세상 닮은 아바타는 사랑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고백은 없고 속죄만 있어요 혹시 어디에서 나를 쓰고 있나요 화면 너머로 나풀거립니다 잠들어 있는 동정을 깨우는 아지랑이 속을 걷는 처녀인가요 아직도 못다 한 말이 남아 있나요 우리의 극지는 어디인가요 나를 방금이라도 실어 어디론가 날아가려 합니다 젖지 않는 더듬이로 숲이 되어버린 빌딩에서 상처가 아물기 전 숨을 헐떡이는 당신은 어디로 향하나요 모래성이 되어버릴까요 모래 언덕이 되어버릴까요 나는 접시에 녹는 아이스크림 녹아버린 여름이 무서워 나를 빨아먹어요 안개가 점령해서 부러진 신호등이 건널목을 잠식하는 시간 해와 달이 숨바꼭질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매번 달라 이마에 흘러내리는 푸른 물방울로는 누구인지 말할 수 없어요 날갯짓이 없다면 바람은 다시 불지 않을 거예요 종종 나비의 날개에 새겨진 반점 속으로 사라져요 몇 번의 윤회를 거쳐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심장에 매달리지 않을 거예요 폭풍을 몰고 오다 다시 나비가 되어버린 당신에게
박진형 시인(경주) / 제왕나비가 엘 로사리오 숲에 도착할 때
11월의 하늘은 오렌지 빛깔 빛나는 색을 찾느라 놓쳐버린 보금자리란 없지 빛으로 눈이 부셔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찾아 더듬이 하나로 여행하며 날개에 익숙한 무늬를 새기지 떨어지기 위해 날아가는 날개란 없지 촉수로 능선을 넘고 계곡을 건너는 것은 하늘을 다시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일 엄마의 체취가 묻어 있는 날개 돋은 몸으로 빛의 행방을 묻지
태양의 궤도를 따라 길을 잃지 않으려면 거짓말 못 하는 눈을 감아야 해 낯설고 물선 전나무 숲에 앉아 여린 날갯짓으로 엄마 따라 울금색 폭풍을 만들지 날갯짓이 불러온 바람은 아무도 해치지 못하지 숲으로 얇은 날개 한 쌍을 퍼덕이며 날아올 때 젖지 않는 날개가 두려움을 날려 보내지 혼몽으로 전생의 기억이 흐트러질 때 태어나기도 전에 들었던 선율 전나무 숲에서 겹소리로 노래하는 오렌지 향 바람 소리를 가지 사이로 듣지
엄마의 엄마가 날아간 곳에 도착할 때까지 이 세상과 저세상을 이을 때까지 등자색 날갯짓을 멈출 수 없지
박진형 시인(경주) / 길 위의 생
간밤에 함박눈 다녀 가셨나 뒤엉킨 길 위 차들 雪雪雪 기다 서다 나뒹굴다 한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한 사내가 노숙자 틈서리에 쪼그리고 앉아 후후 김칫국 넘긴다 목구멍에 되감기는 흐린 진눈깨비, 진눈깨비 철 지난 사랑도 다시 뒤엉키나 실타래 풀린 차들 설설 기다 서다 다시 가나
박진형 시인(경주) / 쇠북 같은
한 오백년쯤 삭은 쇠북 같은
벼린 비수날로 푹, 그은 터진 옆구리 다시 꿰맨
맨주먹으로 퉁, 친
古梅 울림판 끝에,
깊고 그윽하게 불려나와 앉은
언어의 붉은 언어의 수천 나비떼,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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