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시인 / 편의점 라이프
3분 30초만 기다려줄래요 그러면 편의점 구석진 코너에서도 충분히 뜨거워질 수 있어요 폭설이 내리는 막막한 날에도 아름답게 익어갈 수 있다니까요
허기진 추위를 달래는 동그란 은박 뚜껑의 힘 앙다문 입술과 컵라면 입구를 동시에 열면 일회용 면도기를 사다 달라는 집에서 기다리는 애인쯤 잊을 수 있어요 로맨틱 드라마와 대설주의보 사이 짧은 대출 광고가 지나가는 저녁 한겨울에 피는 붉은 포인세티아가 판매대 잡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네요 저 타오르는 사랑처럼 짝을 맞춘 이 나무젓가락처럼 나도 애인과 함께 환한 봄을 향해 행진할 수 있을까요 올라버린 월세를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요 후루룩! 씹지도 않은 1인분이 캐럴을 따라 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요 편리성을 전전하며 살아왔어도 도무지 편해지지 않는 나와 애인의 생활 헐렁한 추리닝 같은 그를 이젠 벗어야 할까요 아니면 나를 벗어 버릴까요 라면 국물 때문에 속이 쓰라려요 밤하늘의 눈발은 점점 굵어지는데 오, 인스턴트의 신이여!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배신한 적이 없어요 꺼져버린 가로등 밑 원룸으로 가는 발자국 위로 눈이 내리고 있어요 신이 쏟아버리는 침묵처럼, 끝없이, 끝없이…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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