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숙 시인 / 바람의 경전
숲에서 바람의 길을 찾는다 그 안쪽으로 들어서자 바람에 찍힌 새의 발자국과 잎들이 내는 휘파람으로 온통, 수런하다 나무가 물길을 여는 것도 태양의 그림자가 숲의 바깥으로 향하는 것도 나무에 난 푸른 상처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숲이 길을 내기 위해 오랜 시간 직립을 꿈꾸었듯 바람도 직립을 향해 숲으로 든 것일까 직립이란 때론 위험한 거처다 허공의 고요를 넘겨다보며 삐걱거리기도 하고 때론 푸른 무게를 읽어 제 안의 힘을 바람에 맡길 지혜도 필요하다 그러나 바람은 복면을 쓴 채 숲을 공략할 것이고 간혹 상한 손길이 직립의 물길을 가로채기도 하겠지만 휴식을 반납한 숲은 지금 성업 중이다 풀꽃들의 경전이 태양인 것처럼 나무의 경전이 바람임을 숲에 이르러 읽는다
한인숙 시인 / 풀 9
풀들의 환승역은 겨울이다 침묵을 묻고서 무심히 갈아타는 누런 사유의 행방 어디선가 메마른 바람 일어서고 발 저린 기억의 반쪽이 추억 깊이 체온을 찔러넣고서 허공에 깊이 휘파람을 날린다 언젠가 푸르렀던 이름의 옆자리를 떠올리며 공백의 한끝. 묵정의 안부가 열렸다 닫힌다 이미 지상을 빠져나간 시간은 무효다 사리라도 쥐어진 듯 지난여름 들끓던 울음의 알들은 바람이 빠져나갈 때마다 늑골이 휘고 푸름을 버텨내던 태양은 벌레가 진화하기에 충분했다 이맘쯤의 풀은 갓 구운 허무처럼 파삭하다 바람 깊이 묻어나는 경련이 텅 빈 고요를 흔든다 사유들이 땅 밑으로 내려간 계절의 끝 오래된 역처럼 제 몸 한켠 날것들에 비워준,
지난밤 만개를 불러들였던 것도 풀들의 겨울나기였을까
- <시인동네> 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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