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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영주 시인 / 능소화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8.

전영주 시인 / 능소화

 

 

가녀린 몸 길게 빼어

어느 집 담장 밖으로 뒤꿈치 높이 들고

 

임의 발걸음 들으려

귀 활짝 열어 기다리길 수백 년

 

독을 품어 만지는 이의 눈을 멀게 하는 여인의 몸부림은

뜨건 뙤약볕

시들지 않고 송이채 떨어져 아름다운 자태 뽐내어본다

 

다시 찾치 않는 무심한 낭군

혹여 오실까

붉은 핏 빛 같은 기다림은

 

긴 상념 속 사랑의 매듭으로

더 멀리

더 높은 곳 휘어 감고 유혹한다

 

 


 

 

전영주 시인 / 붉은닭을 팔다

 

 

사내가 앞치마를 두르다. 통도마 위에 냉동닭이 놓이다

단숨에 내려찍는 칼에 여섯 토막으로 아침이 갈라지다

사내의 아내가 다시 하혈을 시작하다. 뭉클뭉클 뜨거운

기름이 끓어오르다. 양념치킨집의 영업이 시작되다.

기름의 온도가 상승하다. 하혈하는 방의 온도가 상승하다.

사내가 아내를 벗겨 냉동실에 처박다. 담배를 한 대 피우다.

일주일 전에 처박았던 아내를 꺼내다. 단숨에 여섯 토막나다.

삼일 전에 처박았던 아내를 꺼내다. 이틀 전에 처박았던

아내를 꺼내다. 기름솥이 육중한 몸체를 흔들며 끓다.

토막들을 망으로 건져내다. 하혈같은 붉은 양념 소스를 끼얹다.

붉은닭이 포장되다. 날개 돋치기도 전에 다 팔려버리다.

가게 문을 닫다. 안쪽에서 철제셔터를 내리다.

한달 전에 처박았던 아내를 냉동실에서 꺼내다.

요를 깔고 눕히다. 혁대를 풀고 바지를 내리다.

 

 


 

전영주 시인

1987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동국대 예술대학원 졸업. 시집 『물 속의 물방울』과 『붉은닭이 내려오다』가 있음. 산문집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