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한인숙 시인 / 바람의 경전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8.

한인숙 시인 / 바람의 경전

 

 

숲에서 바람의 길을 찾는다

그 안쪽으로 들어서자

바람에 찍힌 새의 발자국과

잎들이 내는 휘파람으로 온통, 수런하다

나무가 물길을 여는 것도

태양의 그림자가 숲의 바깥으로 향하는 것도

나무에 난 푸른 상처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숲이 길을 내기 위해 오랜 시간 직립을 꿈꾸었듯

바람도 직립을 향해 숲으로 든 것일까

직립이란 때론 위험한 거처다

허공의 고요를 넘겨다보며 삐걱거리기도 하고

때론 푸른 무게를 읽어

제 안의 힘을 바람에 맡길 지혜도 필요하다

그러나 바람은 복면을 쓴 채 숲을 공략할 것이고

간혹 상한 손길이 직립의 물길을 가로채기도 하겠지만

휴식을 반납한 숲은 지금 성업 중이다

풀꽃들의 경전이 태양인 것처럼

나무의 경전이 바람임을 숲에 이르러 읽는다

 

 


 

 

한인숙 시인 / 풀 9

 

 

풀들의 환승역은 겨울이다

침묵을 묻고서 무심히 갈아타는 누런 사유의 행방

어디선가 메마른 바람 일어서고

발 저린 기억의 반쪽이 추억 깊이 체온을 찔러넣고서

허공에 깊이 휘파람을 날린다

언젠가 푸르렀던 이름의 옆자리를 떠올리며

공백의 한끝.

묵정의 안부가 열렸다 닫힌다

이미 지상을 빠져나간 시간은 무효다

사리라도 쥐어진 듯 지난여름 들끓던 울음의 알들은

바람이 빠져나갈 때마다 늑골이 휘고

푸름을 버텨내던 태양은

벌레가 진화하기에 충분했다

이맘쯤의 풀은 갓 구운 허무처럼 파삭하다

바람 깊이 묻어나는 경련이 텅 빈 고요를 흔든다

사유들이 땅 밑으로 내려간 계절의 끝

오래된 역처럼 제 몸 한켠 날것들에 비워준,

 

지난밤 만개를 불러들였던 것도

풀들의 겨울나기였을까

 

- <시인동네> 2014년 겨울호

 

 


 

한인숙 시인

1961년 충북 청주 출생. 2006년《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십이월의 교차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푸른 상처들의 시간』(다층, 2007)과 『자작나무에게 묻는다』(문학의전당, 2014)가 있음. 〈안견문학상〉 대상을 수상. 현재 평택문인협회, 〈시원〉 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