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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수찬 시인 / 모과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1.

서수찬 시인 / 모과

 

 

회사 앞 화단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나무에는

열매가 익기 전에

따먹지 말라는 푯말이 걸려 있다

못 생긴 모과를 따먹는 사람이 있긴 있나 보다

누가 몇 백번을 주물렀다 폈다 하면서

구겨놓은 열매

어디서나 다 보일 만큼 큰 열매

신문지로 덮어두고 싶은

비밀한 열매

나도 시집을 내면

시집 앞에 제목 대신

시가 익을 때까지 읽지 마세요, 라고

적어놓아야겠다

내가 몇 백번 주물렀다 폈다 해놓은

내 모과들

 

시집 『버스기사 S시인의 운행일지』(시인동네, 2020) 중에서

 

 


 

 

서수찬 시인 / 복개공사

 

 

우리가 부실하게 엮은 가정을 위해서

각목에 튼튼하게 박은 자식들을 위해서

난곡동 개천에 흐르는 똥물로 만나

번듯한 선진조국을 가늠하며

복개공사를 한다

우리야 속으로 감추어야 할 쓰레기 같은

인생들이지만

언제인가 만두 속처럼 터져 나올

희망 때문에

거푸집을 만들고 거기에 우리의 생활을

부어 넣는다

단단하게 굳은 아픔을 딛고

자가용이며 버스는 쌩쌩 달리면 그만인데

우리의 자식들은 그 길로

등록금을 가지러 집으로 쫓겨 올 것이다

아내처럼 떠내려 오는 똥 덩어리를 바라다보며

정부미로 채워진 도시락을 까다보면

목에 걸리는 욕지거리마저

그대들은 환상의 올림픽으로 복개를 하려 하지만

우리는 한 달도 못가서

뚫고 일어나 저 떠내려오는

아내나 철석같이 사랑하리라

규율과 질서로 잡혀지는 선진조국도

우리의 등을 짓누르는 질통 속의 선거공약도

시멘트와 알맞게 비벼질 그날을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삽질을 할 뿐이다.

 

 


 

 

서수찬 시인 / 접착을 하며

 

 

번듯한 장롱과 화장대를

꿈꾸며

접착을 해도

세상에는 돼지본드로도

안 붙는 것이 있다

우리 앞에서는 언제나 인자한 아버지처럼

노사화합을 가르치고

현장 구석 구석에 고충함을 설치 해

화해만이 우리의 살길 이라고 부추겨 되지만

뒤로는 전문 법조인이나 경찰을 끌어들여

하루 열 세시간 노동으로 쥐어짜고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치하하는

잘난 사장과는 우리는 절대로

틈 하나 안 벌어지게 붙을 수가 없다

사장이 아무리 순간 접착제 같은 구사대를

동원해 우리를 굴종적 삶에

강력하게 붙이려 해도

정의사회가 백골단을 동원해 바이스 같이

꽉꽉 물어 뜯어도

끝내는 우리의 가정이 불량품으로

보일러실에서 소각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비로서 인간이 되는

노동해방이 소비자의 가정에 흠 하나 안생기고

배달 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전부 일손을 놓고

저마다 망치가 되고 톱날이 되어

식당으로 모이기 시작 했다

우리의 굳게 맞잡은 이 손만이

갈라진 이세상을

틈 하나 안벌어지게 붙일 수 있음을

서로 확인 하면서.

 

 


 

 

서수찬 시인 / 안전장치

 

 

기계인줄  알았어

스위치만 넣어주면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는 기계인줄 알았어

하지만 안전장치가 제거 된지 오래인

노사화합의 톱날에

손가락을 절단 당하고

시퍼렇게 흐르는 피를 보며

팔팔 뛰는 손가락을 보며 너희들처럼

우리도 인간임을 새삼 깨달았어

너희들은 생산량 향상을 위해

우리들을 물 한방울 안남게 짜내기위해

쉽게 안정장치를 제거 하지만

우리들의 잘려나간 손가락에는

너희들의 개 만치도 여기지 않는

우리들 가족의 목숨이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 해 보았나

앉아서 보상이나 바라는

편안한 사무직으로의 부서 이동이나 꿈꾸는

그런 과거의 노동자가 아니야

혼자서만 해결 하려고 길길이 날뛰면서

돌덩이처럼 꼼짝도 않는 동료들의 의식을

되려 속으로 욕이나 하는

그런 조급한 노동자가 아니야

너희들의 안전장치는

권력과 자본과 법이지만

우리들의 안전장치는 그것을 깨부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단결투쟁뿐임을

저 잘려나간 손가락은

가르치고 있어.

 

1989년 《노동해방문학》등단시

 

 


 

서수찬 시인

1963년 광주 광산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접착을 하며>, <복개공사>, <안전장치>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시금치 학교』와 『버스기사 S시인의 운행일지』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