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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인덕 시인 / 모르는 사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0.

백인덕 시인 / 모르는 사이

 

 

누가 오지 않아도 밤은 깊어간다.

 

 어둠에 압도당한 불빛, 밤은 깊이 웅크린 것들을 되살린다지만 아무 데나 가 걸리는 마음은 가변성 (可變性) 좋은 병(病)일 뿐, 계절은 저절로 돌아오고 모든 봄꽃은 자기(自己)의 완성을 위해 핀다. 예전에 도,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얼얼한 손끝으로 검은 자판을 두드리며 먼 대륙, 찟긴 나라와 사람을 말하고 싶지만 거리(距離)는 거리에서 가늠될 뿐, 골목 안에서 우는 고양이 털빛이 한밤의 모든 생각을 뒤집는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허기일까, 춘정(春情)의 시작일까, 잘못 든 길의 단순한 공포일지도 모른다.

 

 누가 오지 않아도 저절로 깊어가는 밤은 낮은 곳에서부터 웬 고양이 울음에 찟길 것이다. 모르는 사이, 매장(理葬)의 긴 행렬이 폐허를 수놓고 들뜬 상춘객 얼굴 달린 꽃잎보다 넘쳐도 더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저 모르는 사이일 뿐.

 

 


 

 

백인덕 시인 / 여전히 낯선 세계와 꽃말들

 

 

어제는 비

그제는 비, 그끄제도 비

셀 수 없이 많은 비가 내리고

한 뼘만 한 우산을

눈썹에 걸고 쏘다녔다.

 

비는 눈으로 맞는 것,

보지 않으면 젖지 않는다.

 

어제 읽은 시

그게 읽은 시, 그리고

먼 옛날부터 나를 앓게 한 무수한 시

세계가 구르는 소리는

귀를 닫아야 들린다

 

자기는 마차를 타고

나는 무릎으로 걷는다.

 

어제 온 시집

그제 온 시집

그게 온 시집 앞에서

손톱 밑에 가시가 자라고

어두운 살갗을 파고드는

구원은 영 틀린 이름

 

어제 피운 시가6

그제 피운 말보로 미디엄

그제 피운 카멜 블루

파랗게 붉게 검게

내 폐는 돈을 먹고 죽음을 키운다.

 

오늘도

여전히 낯선 세계와 꽃말들

 

 


 

백인덕 시인

서울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등. 현재 계간 『아라문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