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완 시인 / 창가에서
화분의 고춧대는 하얀 별모양 꽃을 늘려갔, 살아난 금낭화가 처음으로 꽃등을 세 개 매달았, 일일초는 지고 또 피고 양란도 향기 없는 꽃을 벌렸, 화분에서 흙 밖으로 나온 새끼 지네 한 마리는 살해되었, 맥주잔에 빠진 초파리 한 마리도 살해되었, 노르웨이산 고등어는 토막 난 채로 안주가 되었, 대나무 가지 몇 개도 잘려 쓰레기봉투에 담겼, 오늘이 생의 끝날이 된 것들에게 아무도 축배하지 않았, 다육이의 말라 가는 맨 아래 잎이 미세하게 더 쭈그러졌, 시집은 읽히지 않고 펼쳐진 채 햇살을 받았, 창밖엔 어제처럼 배달오토바이가 지나다녔, 김밥집 앞에 뒷문이 열린 택배트럭이 비상등을 깜박이고 있, 여자애 몇이 쫑알쫑알 까르르르 단역처럼 지나갔, 이 창안에는 강요도 시샘도 자비도 슬픔도 없, 점집 개도 졸게 늘어진 기운은 빌딩들 사이로 스몄,
조병완 시인 / 시론 16-1
어떤 시인이 내 개인전 전시장에 와서 시를 내놓으라 한다. 첫 시집 이후 한 편도 안 썼다고 했더니 여기 앉아서 쓰면 되겠다고 한다. 그래 오늘은 휴대전화기에 메모하며 생각한다. 내 시는 무엇이고 무얼 할 수 있나, 그림 속 꽃산에서 붉은 꽃이 이글거린다. 새 두 마리 날아 허공은 광활하고 검은 바위 뒤의 상황은 알 수 없다. 거기 무슨 풀이 자라는지 어떤 벌레가 기어 다니는지 알 수 없다. 내 시는 그 바위 뒤에 있는가, 나는 정작 시를 쓰지 못하고 전시장에 들어오는 사람의 행동거지나 옷매무새 또는 뒤통수를 본다. 내 시는 저 뒤통수에 있나 아니 저 사람의 자켓 안주머니에 있나, 나와 저 사람의 움직임 사이에 있는가, 내가 믿는 것과 저 사람이 보는 것 사이에 있나, 조금 전과 지금 사이에 있는가, 내가 앉은 자리와 그림이 걸린 저 벽 사이에 있는가, 저 붉은 색과 푸른 색 사이에는 시가 없단 말인가, 내 마음과 저 사람 마음 사이에 없단 말인가, 내 욕심과 텅빈 지갑 사이에 있는가, 그걸로 무얼 하겠는가. 시를 쓰기 전과 쓰고 난 다음에 나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한 관람객이 지나간 그림 앞에 내 마음이 닿자 갸우뚱 빈 공간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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