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서춘희 시인 / 모래라는 빛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0.

서춘희 시인 / 모래라는 빛

 

 

빛은 싸울 때 생긴다

구기고 싶은 의지는 별이 되었다

 

짠물을 뱉으며 복서가 뛴다

검은 바다를 벗어나 복서가 뛴다

 

우리는 입이 없는 작은 벌레

나약한 병사

부러진 의자에 묶인 연처럼

깊은 잠을 청할 줄 모른다

 

불분명하게 말라가는 어제의 뱀처럼

당신과 나는 젖은 모래를 파고든다

 

봤어?

못봤어...

 

삼킬 수 없는 것을 삼킨 얼굴로

마주보았지

 

모래를 따라 모래 끝까지

발이 빠졌지

 

오래... 가능한... 싸우자...

드러나지 않은 밤에 집중하는

 

이곳의 나무처럼

 

르르르르

한 세기를 그으며 우는 유성처럼

 

 


 

 

서춘희 시인 / 위생

 

 

기본적인 저녁마다 머리와 꼬리를 잃고 나란히 포크를 든다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시곗바늘의 끝, 누군가 한 말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드러나는 부분을 래핑한다. 대체로 신선한 상태의 빛이 닿기도 한다. 전염되기 쉬운 신(神)의 손목은 꺾인다. 반문 없이 증가하는 기포처럼. 우리는 가볍다. 매일 개명하고 살갖은 흰 벽을 따

라 이동 이동...

 

목에 걸린 알약이 녹는 동안, 그림자가 연거푸 물을 마신다. 먼지를 빨아들이는 대기는 점점 팽창한다. 매캐하게 노란 꽃이 벌어진다. 가까운 소각장을 떠올렸다.

 

비는 반복적이다. 반복해야 할 것들을 뱉는다. 집행관은 표정이 없다. 눈동자가 까맣게 흘러내리는 벽화, 비처럼 서서 빗물로 양치질을 했다.

 

보글보글 웃는 연습을 한다. 신속하게 비워진다. 슬픔이나 반성 따위를 지릴지 모른다. 닦아서 쓸 수 있는 손이 있다는 것, 안도는 어디까지 안도인가.

 

우리는 바람이 될 수 없다.

규정할 수 없는 촉감은 잊기로 했다.

 

-《시인동네》(2017, 1월호)

 

 


 

서춘희 시인

1980년 전남 해남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계간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