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선 시인 / 여윈잠
공원 한쪽 낡은 의자에 푹 잠겨 있는 그 남자 허름한 오후가 매달려 있는 등위로 햇살은 허리 잔뜩 구푸리고 그의 잠을 굽고 있어요 여러 색깔로 구워지고 있는 그의 꿈이 헤벌쭉이 벌린 입에서 설겅거려요
보름달 부풀 듯 탱탱했던 한때가 그에게도 있었다는데 그 누런 세월 한 점씩 떼어먹을수록 허공의 길 위에서 달빛을 뒤척이며 여위어 갔죠 옆구리 터진 낮달처럼 널브러진 불안한 시간, 뒤집었다가 뒤집혔다가 부수수 아직 덜 구워진 잠이 지친 어깨를 꾸욱 꾹 눌러요 얼핏 스친 꿈속에서 하다만 말 한마디 빠르게 오후 4시의 행간을 빠져나가요
누군가 그를 부르는‘옛 시인의 노래’가 그의 손끝에서부터 살얼음처럼 아슬한 내일의 무릎 아래로 길게 누워요
지하선 시인 / 발편잠 1
네 몸을 내 안에서 환하게 펼쳐봐 투명해지는 네가 내 몸의 무늬를 베껴갈수록 나는 네게로 더 깊어지지
어둠이 꿈틀꿈틀 길 하나 틔어 놓으면 서로의 체온이 낯선 풍경 속으로 들어가지 따끔거리는 신음처럼 잠꼬대 흐르고 젖은 네게서 간간이 슬픈 냄새가 나지 속살거리는 소리가 내 안에서 한 점으로 모이고 별의 모서리 부수며 침묵으로 반짝이지 하루의 매듭 끝에서는 생각이 머물고 시간도 멈추게 되지 네가 내게로 한 몸처럼 스며들면 너와 나 고요의 이불을덥고 적막한 그믐처럼 깜깜해지는 거야 그때 나는 널 위해 바닥의 비밀을 열어야 하지 단단히 닫힌 바닥이 점점 무게를 버릴 때쯤 창백한 시체처럼 누워있는 꿈 위로 전생의 죽음이 포근히 덮이지 희고 긴 맨발 나란히 죽음 밖으로 나오고 밤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지지
지하선 시인 / 잠의 무늬
윤년 윤달에 몇 십 년 잠드셨던 아버지 잠깐 이승으로 모셨다
어둠의 무게에 짓눌렸던 나의 뿌리 하나씩 햇살이 읽어 줄 때마다 훅 끼치는 뜨거운 숨결에 허공 한 귀퉁이가 내려앉았다
우리가 살 다 파먹고 남긴 복숭아뼈처럼 아직 남은 몇 개의 잿빛 흔적들이 불빛으로 여물어 갈 때 해의 꼬리 툭 끊어지고 아버지의 깡마른 그림자 바닥에 눕는다 거뭇거뭇 새겨지던 시간의 무늬 엉겨 붙는다
90년 한평생이 한 줌으로 압축되는 조밀한 틈새로 홀로 우셨던 고독한 목청 켜켜로 쟁여지고 있다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괜찮다 괜찮다’
전혀 괜찮지 않으면서도 늘 그렇게 하셨듯이 또다시 재생되고 있는 아버지 말씀 푸른 핏줄이 돌 듯 온몸을 돌고 있다
지하선 시인 / 선잠
아버지 잠의 귀 언제나 내 방 앞을 서성이며 작은 신음에도 당나귀 귀처럼 커지곤 한다
가위눌리는 악몽, 시커먼 통증이 덮치는 미로 속에서도 내게로 기울이는 아버지의 큰 귀
졸음도 깊은 잠도 모로 세워 놓고 꿈의 무늬 감겨있는 내일의 머리맡에서 밤과 나 사이를 오가며 점점 넓어진다
몸속 좁은 골마다 벌겋게 열꽃이 부르트고 깜박거리는 심장, 발소리까지 멎은 자리에 새벽 한 시의 손이 사방을 닫고 무덤을 끌고 올 때도 불의 눈빛으로 또 다른 출구를 열어 준다
막다른 골목에서 막막한 나의 계절 굽이굽이 밝은 빛 켜들고 앞장 서곤 한다
지하선 시인 / 쇠별꽃 꿈밖으로
스물다섯 늦깎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당고모 행여 누가 볼까 담 밑에 고즈넉이 숨어 있었죠 막내동생보다 어린 동급생과 밀회하다 들켰대요
풍각쟁이같이 풍문만 무성하게 두고 떠난 허연 약속을 심장 깊이 박아 놓은 목숨 건 첫사랑이었지요
장승 되어 서 있다가 빛깔만 남은 그리움 은하수 저편에서 쇠고 쇠어버린 슬픔으로 껌벅인다 했지요
어둠이 고여 있는 낮고 낮은 곳으로 별 한줌 쏟아지던 날 햇살보다 환한 울음을 보았지요
챙그랑, 챙그랑 비바람에 휘둘렸던 그 사랑이 쇳소리 내며 울고 있네요 아득한 시간의 뒤쪽에선 녹슬어 부딪치는 붉은 눈물이 어둠 속 꿈을 부수고 하얗게 피어나고 있어요
지하선 시인 / 잠의 무게
고등학교 책가방 무게가 10㎏~15㎏까지 된다고 TV에서 방송하던 날 후미진 기억의 골목에서 고삼인 나를 만났어요
밤마다 죽은 꿈을 짊어지고 러닝머신 위의 그림자처럼 제자리만 달리던 그때는 무거워도 아닌 척 짓누르는 졸음도 안 아픈 척 ‘척’으로 포장하곤 했지요 얇은 포장지 너덜너덜 찢어진 틈으로 감각이 마비된 하루하루가 삐져나오기도 했지요 허망한 짐인 줄도 모르고 보이지 않는 정상을 무작정 오르고 또 오르다가 털썩, 주저앉은 곳 내 길의 방향은 사라지고 이정표 없이 다가오는 검은 밤 속으로 속도에 떠밀려 들어갔어요
홀로 남은 막막함, 나의 적막 저쪽에서는 무게를 부수는 망치 소리 들리는 듯,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 고소한 잠의 냄새 흘러나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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