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재 시인 / 대작對酌
혼자 마시기 아까워 매화나무에 먼저 한 잔 줬다 얼마 후 매화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폈다
혼자 마시기 미안해 살구나무에도 또 한 잔 뿌렸다 다시 얼마 후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혼자 마시기 영 거시기 해 개 밥그릇에도 한 잔 가득 따라줬다 밥그릇을 핥자마자 아무나 보고 짖었다
이 모든 걸 기우뚱한 반달이 보고 있었다
이동재 시인 / 섬, 어느 밤
그날 밤 섬은 밤새도록 바다가 밉다고 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섬과 바다의 경계를
조개가 사는 곳은 섬이고 물고기가 사는 곳은 바다라고
이동재 시인 / 시인 故 김남주
나에겐 너무 종이가 많구나!
0.7평의 교도소 감방에 갇혀 우유곽이나 담뱃갑 속 은박지에 칫솔을 감아 시를 쓴 그대여 똥종이에 시를 쓴 시인이여
부끄럽게도 나에겐 종이가 너무 많구나!
<분단 시대의 사소한 너무나 사소한>, 문학과의 식, 2013.
이동재 시인 / 파주
파주에서 산다는 건 어디 멀리도 못 가고 주말이면 임진강 물빛이나 보러 가는 것
나이 들어가며 여기에서 산다는 건 아주 멀리 달아나지도 못하고 돌아와 오랜 아내와 철따라 임진강 물빛이나 보러가는 것
그 물 매운탕에 끓는 속이나 푸는 것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이동재 시인 / 새 집
새 집에선 소리가 난다 모든 게 낯설어 벽과 벽 벽과 천정 가구와 가구 그리고 바닥이 만나는 부분에서 자기 자리를 잡느라 삐걱거리는 소리 밤새 수인사 하는 소리
새 집에선 냄새가 난다 미처 마르지 않은 나무 그 나무가 살던 숲과 공기 새들과 계곡의 물이끼 산짐승들의 발정난 냄새와 진달래 철쭉 이름 모를 약초 냄새까지 채석장의 화약 냄새와 골재 트럭이 훑고 간 강바닥의 기름 냄새마저
이합과 집산 고통과 환희 이 모든 것의 접합 부분에선 밤새 소리가 난다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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