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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동재 시인 / 대작對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1.

이동재 시인 / 대작對酌

 

 

혼자 마시기 아까워

매화나무에 먼저 한 잔 줬다

얼마 후 매화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폈다

 

혼자 마시기 미안해

살구나무에도 또 한 잔 뿌렸다

다시 얼마 후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혼자 마시기 영 거시기 해

개 밥그릇에도 한 잔 가득 따라줬다

밥그릇을 핥자마자 아무나 보고 짖었다

 

이 모든 걸

기우뚱한 반달이 보고 있었다

 

 


 

 

이동재 시인 / 섬, 어느 밤

 

 

그날 밤

섬은

밤새도록

바다가 밉다고 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섬과 바다의 경계를

 

조개가 사는 곳은

섬이고

물고기가 사는 곳은

바다라고

 

 


 

 

이동재 시인 / 시인 故 김남주

 

 

나에겐 너무 종이가 많구나!

 

0.7평의 교도소 감방에 갇혀

우유곽이나 담뱃갑 속

은박지에 칫솔을 감아

시를 쓴 그대여

똥종이에 시를 쓴 시인이여

 

부끄럽게도 나에겐 종이가 너무 많구나!

 

<분단 시대의 사소한 너무나 사소한>, 문학과의 식, 2013.

 

 


 

 

이동재 시인 / 파주

 

 

파주에서 산다는 건

어디 멀리도 못 가고

주말이면 임진강 물빛이나

보러 가는 것

 

나이 들어가며 여기에서 산다는 건

아주 멀리 달아나지도 못하고

돌아와 오랜 아내와

철따라 임진강 물빛이나 보러가는 것

 

그 물 매운탕에 끓는 속이나 푸는 것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이동재 시인 / 새 집

 

 

새 집에선 소리가 난다

모든 게 낯설어

벽과 벽

벽과 천정

가구와 가구

그리고 바닥이 만나는 부분에서

자기 자리를 잡느라 삐걱거리는 소리

밤새 수인사 하는 소리

 

새 집에선 냄새가 난다

미처 마르지 않은 나무

그 나무가 살던 숲과 공기

새들과 계곡의 물이끼

산짐승들의 발정난 냄새와 진달래 철쭉

이름 모를 약초 냄새까지

채석장의 화약 냄새와

골재 트럭이 훑고 간 강바닥의 기름 냄새마저

 

이합과 집산 고통과 환희

이 모든 것의 접합 부분에선

밤새 소리가 난다

냄새가 난다

 

 


 

이동재 시인

1965년 경기 강화 교동도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국문과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8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2007년 <정신과표현>소설 등단. 시집으로 『민통선 망둥어 낚시』, 『세상의 빈집』, 『포르노 배우 문상기』, 『분단시대의 사소한 너무나 사소한』, 『주 다는 남자』, 등이 있음. 소설집 『파워 인터뷰』. 평론집 『침묵의 시와 소설의 수다』 현재 터키의 에르지예스대학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