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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옥 시인(부산) / 벽화마을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1.

김명옥 시인(부산) / 벽화마을

 

 

 저 무수한 계단이 끝나는 곳은 달이 걸려있겠지 잃어버린 마을이 환생되었다는 소문을 따라 골목길을 몇 번이나 접었다가 펴니, 잉어가 푸른 물줄기를 가르며 솟구쳐 오르는 강물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풍선을 잡고 곧 날아오를 듯한 아이들, 꽃잎 위에 앉은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오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늘진 쪽창 밖에는 별이 무럭무럭 자랐다 기적같이 붓이 지나갈 때마다 신화가 탄생하고 생기 없던 동네사람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박물관은 놓친 기억들을 불러 모으고 골목어귀 커다란 천사날개를 어깨에 달자 행복한 미소가 훨훨 날아 단풍 든 숲 벽화로 들어앉는다

 

 


 

 

김명옥 시인(부산) / 네일, 내일

 

 

접힌 신문지를 활짝 펼쳐 놓고

돋보기 쓴 아들이 노모의 손톱을 깎는다

까마득한 옛날

아들의 손톱을 조심스레 손질하던 엄마

이제 투박하고 주름진 두 손을 아들 앞에 내민다

검버섯으로 얼룩진 손가락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늘 적당한 방어가 필요하듯

날카로운 무기가 되지 못하는 방패를 다듬는다

똑똑, 활처럼 휘어진 삶의 편린이 떨어져 나가고

무딘 손톱깎기는 발톱 앞에서 주춤거린다

 

세월의 각화로 퇴적층이 된 공간

서랍에서 더 견고한 기구를 찾아내고

창도 방패도 못되는 발톱

정성을 다해 다듬는다

 

무지외반의 툭 튀어나온 발가락

가장 낮은 곳 무게를 위해

뚜벅, 성큼, 바닥을 지켜주던 곳

 

모순의 손가락 끝 무뎌진 비늘이거나

더 모순의 완고한 각질이

미래의 불안함을 다독거리며

마침내 가지런해진 내일의 입구가 훤하게 보고 있다

 

 


 

 

김명옥 시인(부산) / 나무망치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하는 망치가 누워있다

그가 일어서면 우리는 바짝 긴장한다

찬성과 반대의 줄다리기는 팽팽해서

같이 흥분하지 않으려고

사포로 곧게 다듬어진 결을 잠재운다

땅땅땅, 사정없이 탁자 위에 머리를 박을 때

누군가는 손뼉을 치고

누군가는 야유를 보낸다

스릴 없는 회의 초대장을 찢고

갈수록 대범해지는 당신은 누구인지!

 

그는 틈만 나면 정의를 강조한다

매일 어디선가 정의가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진실은 서류더미 속에서 말을 오물거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 증언은 쌓여간다

당신의 의견을 속 시원하게 깔아뭉개고

망치는 재빠르게 몸의 자세를 바꾼다

가볍지만 한없이 근엄한 나무망치 아래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가슴에 못 박히지 않기 위해 안간 힘쓴다

 

 


 

 

김명옥 시인(부산) / 거문 오름

 

 

지금부터 격렬함이 폭발한 현장을 탐방할게요

아무 것도 상상하지 마세요

대열을 벗어나면

당신이 협곡으로 남을 수도 있어요

 

첫 번째 전망대에서 기억의 문을 더듬어 보세요

그토록 둥글고 깊게 패인 고통을 누가 위로해 주던가요

뜨겁게 달아올라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달리던

그 부근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세요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 얼마나 힘들던지요

여윈 나무들이 찾아와

헤진 몸 사이사이

군락을 이룰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지요

때론 모든 걸 덮고 동굴로 숨어들고 싶었지요

 

마지막 전망대에서 휘파람새 소리 들으면

이제 평화구역으로 들어선 거 맞아요

새잎마다 넘치는 사연 가득 품에 안더니

지나온 세계 아로새긴 명찰이 가슴에 빛나네요

 

 


 

 

김명옥 시인(부산) / 배롱나무, 그녀

 

 

그녀의 살결은 너무 매끈해서 눈에 잘 띈다

화사한 봄기운에도 기척 없다가

줄줄이 꽃을 문 사내의 발걸음에 놀라

서둘러 초록의 옷을 걸친다

간지럼을 잘 타 조금만 긁어도

자지러지게 웃는 그녀

쏟아지는 매미 소리 끌어안으며

기세등등 햇살 아래서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며

분홍빛 레이스 짜는 해묵은 배롱나무

누구의 일생을 읽고 있는지

가마솥 열기에도 꿋꿋하게

백일간이나 기원하는 간절함이 환하게 빛난다

오늘은 소나기 한 줄기 내려올까

절절 끓는 하늘 올려다보며

근심 한 줄기 지워 보는 무기력한 오후

뜨거운 호흡 가다듬고

내면의 고요를 짚는다

 

 


 

 

김명옥 시인(부산) / 프라이팬 길들이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프라이팬을 갖다 버렸다

아니 베란다에 쌓아둔다

예열시간이 필요하다는 은빛 스텐 프라이팬을 집어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온다

본래 내 마음은 둥글고 평평하고 이렇게 환하다

마법을 걸어본다

너와 나 사이에는 미끌미끌한 윤활제가 필요해

콩기름, 포도씨유, 해바라기유, 올리브유

 

너는 내게 시비를 건다

내 눈에 보이지 않거나

내 귀에 들리지 않거나

매일 아침저녁 프라이팬을 끌어안는다.

토마토가 익어가고

고등어가 구워지고

맛있는 소리를 내거나

진한 연기가 솟아나거나

너는 나의 눈치를 살핀다

함께 밥을 먹는 동안

부딪칠까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숨이 막혀 환풍기를 틀었다

 

기다리지 못해 새카맣게 타버리거나

아예 눌어붙어버려 원형이 망가진

베란다에 버려진 마음들이 쓸쓸하다

실실 웃다가 벌컥 화를 내다가

적당한 간격을 조절한다

먹음직스런 동그랑땡 굽기

얼마나 힘이 드는지

너는 나를 길들인다

 

 


 

 

김명옥 시인(부산) / 고택을 껴안다

 

 

너무 오래 되어 낡고 추해진 당신 품으로 든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들어서면

앵두나무가 기지개 켜고 불그스레한 눈 비빈다

현판이 걸린 안채

투박한 손길로 반질해진 대청마루

앞마당 여백 반쯤 메운 장독을 열면

삼백년간 식탁을 향한 발효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얀 회벽과 회벽 사이

나무 문살이 가로 세로로 잘 정렬된

방문 둥근고리 잡아당기면

뜨끈한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둔 고봉밥 한 그릇

아직 도착하지 않은 하루를 기다린다

 

마루 북편 쪽문

하루에 수십 번 변하는 풍경화 액자련만

그 다채로운 물감은 어디다 풀어둔 걸까

 

행랑채 칸칸은 저마다 고단함이 묻어있고

이미 오래전 말라버린

뒷마당 우물은 물 긷는 소리 잊은 채

물풀만 무성하고

당신은 한 채 노인으로 쓸쓸하다

 

 


 

 

김명옥 시인(부산) / 고양이를 찾습니다

 

 

전봇대 중간에 달라붙은

고양이가 야옹거리며 쳐다본다

눈 빛 맞추며 품안에 쏙 들어가면

달콤함이 온 몸으로 스미던

그르릉 그르릉, 행복한 소리 꼬리를 흔든다

 

언제 애정은 새어나간 걸까

한순간 사로잡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되고

현란한 빛깔로 치장하며 매달린다

하루라도 못 본다면

꼭 껴안아주지 않는다면

한 때 내 안에서 안주하던 부드러운 공기여

 

아직 못 다한 고백이 풀려나와

보이지 않는 당신의 존재는 점점 위대해지고

숨겨둔 마음 있는 대로 펼치고

변하지 말자는 언약의 기원 더듬으며

격렬하고 뜨거웠던 빈 칸

달아난 사랑을 찾습니다

 

 


 

 

김명옥 시인(부산) / 아몬드나무 꽃피우기

 

 

오늘도 무얼 그리 뒤적거리나요?

한겨울 산어귀 나무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지중해 근처 서성거리는데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나무가 마구 복제된다

 

가이드는 친절하게 벚꽃이 아니라고 설명하자

옆 사람이 견과류 봉지 뜯어 내 손바닥에 붓는다

치매예방에 좋다고 유행처럼 번진 먹거리

타원형의 딱딱한 아몬드

고소한 맛이 차례대로 입 안에서 터진다

 

며칠간 지나 온 여행지가 순간 떠오르지 않아

곰곰 시간을 밀어 올리는데

깜빡깜빡 생각의 조리개가 비상등 켜면

한동안 참담함이 따라붙어 풀쩍 주저앉고 싶다

너무 걱정 말라며 슬며시 가지가 휘어지더니

액자 밖으로 손을 뻗는다

 

툭툭 수많은 과피를 열고 날아오는 격려의 메시지

정수리에 만년설 뒤집어 쓸 때까지

내가 나를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읽어내는 기억 한 그루 활짝 꽃 피울까요?

 

 


 

 

김명옥 시인(부산) / 피아노 계단

 

 

피아노 흰 건반을 지그시 밟는다

숨겨둔 비명소리가 새어나와

단조로운 음계를 건너간다

목적지는 창공을 가르는 새의 노랫소리 근처

일정한 높이로 조율된

끝이 안 보이는 계단

다리가 아파 소리치고

고단한 일상에 걸려 넘어지고

숨이 차서 주저앉는

간절함으로 뒤돌아보다 그대가 보이면

악보는 신나서 즐거운 하모니를 그린다

점점 늘어나는 계단을 즐기기 위해

음표가 리듬을 타고 들썩이고

예고 없는 음이탈로 파열음 속에 잠긴

피아노 계단이

나를 밟고 무심코 지나친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맑은 선율을 찾아

건반과 건반 사이에 끼인 오늘이 눈을 반짝인다

 

 


 

김명옥 시인(부산)

1959년 부산 출생. 부산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199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지금 삐삐가 운다』, 『달콤한 방』, 『프라이팬 길들이기』. 부산시인협회회원. 금정문인협회이사. 부산문학상우수상 수상. 부산대 교육행정직 공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