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옥 시인(화가) / 가면성 우울증
편백나무 베개를 베고 누웠어요. 향기로운 꿈이라도 꿀까봐서요. 활짝 핀 꽃무늬 이불도 덮었어요. 꽃밭에서 노니는 꿈이라도 꿀까 봐서요.
햇살은 휘청거리고 시간만 노릉노릇 익어 가는데 눈물 젖은 손수건은 저 홀로 신음을 삭히네요.
어설펐던 선택들이 머리 풀고 찾아와 목을 조르는 밤 뚜껑 열린 채 나뒹구는 물감들처럼 혼절한 영혼은 아직 경련 중입니다
약도 없는 병에 걸렸다고 소문이라도 낼까요? 기별 없는 희망을 덮어쓰기 할까요?
생존법은 까마득히 까먹었고요. 중독성 있는 이름만 허공에 맴돕니다. 오늘에 접신 된 가면 들이 손짓하네요. 어떤 가면으로 여러분들을 만나러 나갈까요?
"네티,네티"* 이름을 얻지 못한 생의 순교자를 목소리만 귀를 두드립니다.
*네티, 네티 : (이것은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산스크리스트어
김명옥 시인(화가) / 메리골드 씨앗을 받으며
묶었던 머리카락 풀어 빗질하는 저녁 바람에 취한 시간의 비늘들이 말라가는데 그리 살지지 않았던 꽃밭 독을 숨겼거나 약을 숨겼거나 잡고 싶었던 손 놓쳐도 그뿐 어차피 모두 지고 말 뿐인데 누가 부러뜨렸을까 늙은 꽃대 어루만지며 충혈된 눈 비벼봐도 찾을 수 없는 서글픈 성감대 병든 개가 제 발을 하염없이 핥듯 제 상처 외에는 아무것도 아프지 않았었지 그래서 씨앗들은 이승을 훌훌 떠나 보는 것일까
깡마른 손으로 머리핀을 꽂고 나는 왜 꽃밭을 떠나지 못하는지
김명옥 시인(화가) / 자화상 그리기
끙끙 앓는 날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저 여자 죽을 만큼 아파보면 삶이 가벼워지기도 한다는 저 여자 마음 아픈 날에는 시집을 덮고 돌아눕는 저 여자 눈물 나는 날은 가까이 보이기도 하는 저 여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해서 저 여자
허공에 갇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저 여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껍질을 벗겨 여자를 발굴하는 작업
아직, 무엇이 더 남았냐고 내게 묻는 저 여자 아디로 달려 나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한 천년 주저앉으려는 것일까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외면하고 싶은 저 여자
-김명옥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 불교문예출판부, 2021.
김명옥 시인(화가) / 선운사 동백숲에서
한 걸음 일러 만나지 못하고 당신의 잠자리 따뜻하기만을 바랬다
한 걸음 늦어 만나지 못하고 죽어서 이름다운 살점들만 바라보았다
뒤늦게 깨닫는다 때를 놓친다 하여도 만날 인연은 만나진 다는 것을
스스로를 퇴고推敲하다 울먹해지는 숲 얼어붙은 정수리에 깊숙하게 새기고픈 붉디붉은 꽃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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