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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옥 시인(화가) / 가면성 우울증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1.

김명옥 시인(화가) / 가면성 우울증

 

 

편백나무 베개를 베고 누웠어요.

향기로운 꿈이라도 꿀까봐서요.

활짝 핀 꽃무늬 이불도 덮었어요.

꽃밭에서 노니는 꿈이라도 꿀까 봐서요.

 

햇살은 휘청거리고

시간만 노릉노릇 익어 가는데

눈물 젖은 손수건은

저 홀로 신음을 삭히네요.

 

어설펐던 선택들이

머리 풀고 찾아와 목을 조르는 밤

뚜껑 열린 채 나뒹구는 물감들처럼

혼절한 영혼은 아직 경련 중입니다

 

약도 없는 병에 걸렸다고

소문이라도 낼까요?

기별 없는 희망을

덮어쓰기 할까요?

 

생존법은 까마득히 까먹었고요.

중독성 있는 이름만 허공에 맴돕니다.

오늘에 접신 된 가면 들이 손짓하네요.

어떤 가면으로 여러분들을 만나러 나갈까요?

 

"네티,네티"* 이름을 얻지 못한 생의 순교자를 목소리만

귀를 두드립니다.

 

*네티, 네티 : (이것은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산스크리스트어

 

 


 

 

김명옥 시인(화가) / 메리골드 씨앗을 받으며

 

 

묶었던 머리카락 풀어 빗질하는 저녁

바람에 취한 시간의 비늘들이 말라가는데

그리 살지지 않았던 꽃밭

독을 숨겼거나 약을 숨겼거나

잡고 싶었던 손 놓쳐도 그뿐

어차피 모두 지고 말 뿐인데

누가 부러뜨렸을까

늙은 꽃대 어루만지며

충혈된 눈 비벼봐도

찾을 수 없는 서글픈 성감대

병든 개가 제 발을 하염없이 핥듯

제 상처 외에는 아무것도 아프지 않았었지

그래서 씨앗들은 이승을 훌훌 떠나 보는 것일까

 

깡마른 손으로 머리핀을 꽂고

나는 왜 꽃밭을 떠나지 못하는지

 

 


 

 

김명옥 시인(화가) / 자화상 그리기

 

 

끙끙 앓는 날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저 여자

죽을 만큼 아파보면

삶이 가벼워지기도 한다는 저 여자

마음 아픈 날에는 시집을 덮고 돌아눕는 저 여자

눈물 나는 날은 가까이 보이기도 하는 저 여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해서 저 여자

 

허공에 갇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저 여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껍질을 벗겨

여자를 발굴하는 작업

 

아직, 무엇이 더 남았냐고 내게 묻는 저 여자

아디로

달려 나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한 천년 주저앉으려는 것일까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외면하고 싶은 저 여자

 

-김명옥 시집 『꽃 진 자리에 꽃은 피고』, 불교문예출판부, 2021.

 

 


 

 

김명옥 시인(화가) / 선운사 동백숲에서

 

 

한 걸음 일러

만나지 못하고

당신의 잠자리 따뜻하기만을 바랬다

 

한 걸음 늦어

만나지 못하고

죽어서 이름다운 살점들만 바라보았다

 

뒤늦게 깨닫는다

때를 놓친다 하여도

만날 인연은 만나진 다는 것을

 

스스로를 퇴고推敲하다 울먹해지는 숲

얼어붙은 정수리에

깊숙하게 새기고픈

붉디붉은 꽃 도장

 

 


 

김명옥 시인(화가)

2015년 《불교문예》를 통해 등단.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