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명옥 시인(怡井) / 겨울 장미에게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1.

김명옥 시인(怡井) / 겨울 장미에게

 

 

짚 동굴에서

한잠 푹 자고 나면

봄볕 재잘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질 거야

가시도 품고

상처도 품고

까무룩 자다 깨면

환한 세상 열릴 거야

지금은

눈과 얼음의 계절

안으로 스미는 한 오리 빛에

새끼손가락 걸어놓고

째지게 피는 날 기다리는 거야

 

 


 

 

김명옥 시인(怡井) / 한 말씀

 

 

오늘은

심중에 쟁여둔 말들

쏟아놓으러

강가로 갑니다

 

출렁출렁

또 누가 속을 썩이는지

강물은

물낯 가득 주름입니다

 

흘러 흘러가는 생이란

시간의 노를 젓던

물결의 노를 젓던

때로는 깊게

때로는 얕게

주름 고랑 늘려 가는 것

 

가져간 말은

한 마디도 못 꺼내놓고

일어서는 내게

강물이 한 말씀 던집니다

 

입가에 눈가에

굽이치는 주름도

가다가다 뒤돌아보면

살아온 무늬로

펼쳐 놓을만하다고요.

 

 


 

 

김명옥 시인(怡井) / 상처에 대하여

 

 

연잎 모가지

비틀어 따낸 자리

진저리나던 통증 가신

줄기 끝에

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졸고 있다

남의 헌데가

세상에 없는 쉼터인 듯

네활개 편 채

지질한 몸통도

진물 흐르던 꼬리도

다 내려놓고 한껏 평온하다

숨기지 마라!

보여만 줘도 쉼이 되고

바라만 봐도 위로가 되는

서로의 아픔을

 

 


 

 

김명옥 시인(怡井) / 바닥

 

 

나는

허위허위

언덕 오르고

떨어진 꽃잎은 비칠비칠

가풀막 내려가고

 

외따로이

제가끔

호젓이 걷다가

홀홀 날리다가

마침내 닿은 존재의 바닥

 

찢어진 날개들

시르죽은 꽃잎들

금 간 마음들이 모여 앉아

두고 온 푸른 망토에 대해

잃어버린 월계관에 대해

엇갈린 애증에 대해

 

이제 그만

눈길을 거두는 곳

손을 터는 곳

그런대로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는 곳

이울어 저무는 것들이

가만히 몸을 포개는 거기

바닥에서

 

나는

아직도

오르막이었다가

내리막이었다가

 

 


 

 

김명옥 시인(怡井) / 양귀비 꽃밭에서

 

 

뉜가

강변 너른 길에

왈칵 쏟아놓은

저 붉디붉은

속내는

 

선홍빛

뜨거운 염문에

화상 입은

외길은

급히 강물 쪽으로

에우는데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불타고 있는

저 심중 지나치려니

자꾸 신발이 벗어지네

 

욜랑대는

핏빛으로

뛰어들고 싶어

뒤엉켜

붉어지고 싶어

차마

발이 안 떨어지네

 

 


 

 

김명옥 시인(怡井) / 고니를 기다리며

 

 

얼음이 먼저 와서

연못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 위로 푸지게 쏟아진 눈발로

호사스럽게 펼쳐진 희디흰 비단

고니의 발가락이 활짝 꽃처럼 앉을 거기에

침묵만 떼로 와서 엎드려 있다

고니는 오지 않고

고니를 담을 카메라 렌즈만 발자국에 실려

낮과 밤을 끌고 다녔다

고니의 꿈이 떠다니는 호수는

먼 별 너머에 있고

칼바람 스치는 연못에는

지난 시절 연 줄기들만

얼음 속을 바장이며 조각조각 울음을 깨물고 있다

별빛 하나 없는 밤

양어깨에 하나씩 설움을 둘러메고

길 없는 길을 나선 날개는

어디쯤 날고 있을까

시멘트와 경적에 야금야금 먹혀 가던

호수의 언저리는

검은 달빛이 내려와 히죽 비죽 웃고 있다

 

 


 

 

김명옥 시인(怡井) / 풍경

 

 

강중거리는

강아지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던 남자

벤치 옆에

모로 서서 고요하다

 

허공에서 멈춘

그의 손도

순간을 잡고 있는

목줄도 조용하다

 

줄에 목을 맡기고

급한 볼일 보는 강아지를

말없이 기다려 주는

저 심중

 

목줄을

쥔 손안에

발그레 피어나는 온기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김명옥 시인(怡井) / 가시

 

 

맵짜한 시간들

담담히 끌어안고

밥상 위에 누운 고등어

 

난바다 거친 물살

곡절 많은 지느러미 째로

한 끼니 찬이어라

 

게걸스럽게 헤집는 젓가락들

배불리 먹인 후

남기고 간

골기 짠한 등 가시

 

말없이

내어주는 일이라면

가시부터 돋치는

나 보라고

 

추리고 추린

갑골문 하나

밤바다 등댓불 켜듯

또렷이 써 놓았네

 

 


 

 

김명옥 시인(怡井) / 정류장 삽화

 

 

버스가 멈추고 삼월이 내린다.

냉이며 달래며 수북이 담아놓고

행인을 바라보는 노파

반갑게 한 무더기를 가리키는 손끝에

물씬 흙냄새가 묻어난다

겨우내 정류장 옆구리에 붙여

액세서리를 파는 사내의 어둑신한 그림자를

차내며 한 아이가 뛰어 온다

아이의 분홍 옷소매에 끌려오던

젊은 여자가

식은 재 같은 웃음을 물고 허공으로 시선을 가져간다

희붐한 하늘을 일별하며

오가는 사람들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봄을

놓친 줄도 모른 채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한 채의 폐가로 서 있던 은행나무

몸앓이 지피는지

가지마다 푸릇푸릇한 열꽃

금세 ‘파’하고 터질 것 같다

 

 


 

 

김명옥 시인(怡井) / 뜨물

 

 

쌀이 절로

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모판을 지나

다랑논으로 이어지는

어느 여름날

맞닥뜨린 된바람 피하려고

혈육을 밟은 죄

씻고 또 씻어 뼛속까지 투명해야

밥상에 오른다

뒤에 남는 것은

한 번도 밥물 되어 보지 못한

두어 바가지 뜨물이다

내가 어미가 되어

말간 물이 뜨물이 되는

속사정을 턱 괴고 보노라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난 괜찮다 괜찮다

팔순 노모의 얼굴

뜨물 밑에 갈앉았다가

말갛게 떠오른다

 

 


 

김명옥 시인(怡井)

2002년 문학공간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2012년 중랑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물마루에 햇살 꽂히는 소리』. 바림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