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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향옥 시인 / 달항아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2.

조향옥 시인 / 달항아리

 

 

달이 몸속에 들어왔다 나가고 나면

갯벌은 물때를 헛잡고 살았다

턱사리까지 물이 차면 울먹이고

허리사리까지 물이 빠지면 금방 잊었다

숨겨도 조석으로 드러나는 갯벌의 구멍집은

몸이 아는 갯벌이 전부였다

사리와 조금을 몰랐고 물고기길도 알지 못했다

갯바위 따개비처럼 딱딱거리는 낙지처럼 버둥거리는

그믐밤 허물 벗는 게처럼 다시 단단해지는

갯벌의 달이

달이 몸속에 들어왔다 나가고 나면

바지락 달랑게 새끼들이 발발거리는 갯벌의 구멍집에

헛잡고 모여 사는 어린것들 진액으로 모여 있고

젖은 몸 젖은 눈으로 갯벌은 갯벌로 누워

어디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비릿한 설움으로

다시 뻘이 되어 눕곤하는 것이었다

 

달이 몸 속에 들어왔다 나가고 나면

빠져나간 달이

허물만 남은 달에게

뻘이 되도록 오래오래 앓아 온 알 수 없는 달에게

묻지 않는 달에게

달빛이 흐릿하면 갯벌도 흐릿하여

제 몸속으로 난 바닷물의 물길을 갯벌에 펼쳐두고

달은 오래오래 울고 있다

 

달을 비운 달

창백한 빙결의 달항아리

 

 


 

 

조향옥 시인 / 마트료시카 인형

 

 

달빛으로 몸을 씻어요

우리

창가에 서서

입술을 깨물고 옷을 벗은 채

달빛으로 몸을 씻어요

우리

 

창을 열면 그 속에 달빛

달빛을 열면 그 속에 슬픔

슬픔을 열면 그 속에 몸

몸을 열면 그 속에 달빛

 

달빛으로 몸을 씻어요 우리

입술을 깨물고

옷을 벗은 채

 

몸에 그려진 꽃 더 피우지 않는 마트료시카

알람이 울면, 알람을 따라 울고

귀뚜라미가 울면, 귀뚜라미 따라 울고

비바람이 창을 때리면 통곡하고 태풍처럼 울다가 폭포처럼 쓰러져 바다로 가요

우리 바다에 닿아 달빛 허물어지는 바닷물로 만나요 우리

 

달빛이 허물어질 때

창가에서 몸을 풀고

그때 만나요 우리

 

 


 

 

조향옥 시인 / 빈 물병

 

 

훔쳐만 봐도 예쁜 그녀

빈 물병이어요

식탁 위에 서 있어도 청보리 물결 일렁거려요

그릇 씻는 물소리에 날아다니는 보리밭 종달새

재재거려요

귀리 풀씨 귀에 달고 풀꽃 피우는 빈 물병

달개비 물방개 고마리 사는 물병 속

귓속말이 들려요

나 예뻐?

 

잠결 머릿결 쓸고 가는 청보리 바람결

물병 안에

종달새

 

풋 완두콩 맛 아니?

 

훔쳐만 봐도 예쁜 그녀

빈 물병이어요

달개비 물방개 소금쟁이 뛰는 물소리 식탁 위에

풀잎 옷 입고 서 있는 빈 물병

투명한 몸

알 수 없는 빈 물병이어요

 

 


 

 

조향옥 시인 / 당신이라는 이름의 옷

 

 

갖고 싶은 당신입니다

아닙니다 버리고 싶은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을 입고 당신은 나를 벗습니다

늘어졌다 줄어드는 당신은 나의 모양

나는 당신의 모양

빠져 나간 것들은 다른 생의 같은 이름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받혀주는 옷입니다

 

당신이 평생 낸 길을 나는 부정하고

내가 평생 낸 길을 당신은 부정합니다

 

알몸인 나를 벗고 당신은 도로를 건너갑니다

발모양도 없는 슬리퍼를 끌고

 

단지 알고 싶은 건 방법 일 뿐,

불만은 왜 그리도 많은 것입니까

 

온통 검은 나, 온통 검은 당신,

 

나는 당신을 입고 나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행동하고

나처럼 걷기 싫어

 

뽑을 수 없는 당신 못에 걸린 나

나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당신

당신이라는 이름의 한 벌 뿐인 나

나는 당신의 옷

 

 


 

 

조향옥 시인 / 달리는 도배사

 

 

갈기를 날리는 김씨는 도배사

손가락 하나 톡 튕겨

꽃잎이 벙그러지는 벽지를 고른다

오렌지 잔이 엎어지면 노을이 되고

노을빛 하늘거리는 금붕어꼬리

그녀의 원피스자락이 되는 벽지를 고른다

벽지 본향은 초원이다

풀물 드는 풀밭에 앉아 오늘도 편자를 간다

역마살 낀 빗자루 쓱쓱 문지르면

마을이 생겨나고 강물이 생겨나고

길이 생겨난다

먼지 뽀얀 광야를 내달리고픈

김씨는 벽지 도배사

숨 턱턱 막히도록 달리는 길은 언제나 벽

좁고 긴 걸상 위로 잽싸게 굴러 일어서는

똑딱 칼잡이의 삶

똑딱, 칼끝을 분지르고 단숨에

손가락 사이로 벽과 벽 하늘과 하늘 경계를 긋고

벽에 귀를 대면 들리는 소리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조향옥 시인

1956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11년《시와 경계》로 등단. 시집으로 『훔친달』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