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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위상 시인 / 바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2.

[2012 시에 신인상 시 당선작]

권위상 시인 / 바다

 

 

1

바람은 늘 갯벌로부터 불어왔다

망각(忘却)도 수없이 반복한 일상의 중턱에서

살아간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거품을 튀기면서 일깨우던 바다

발목을 빠뜨리고

유년의 기억을 하나 둘 흔들어낸다

이 작은 항구가 꿈꾸어오듯

파도는 온몸으로 꿈을 밀어밀어

닿아야 할 그리운 나라로 손을 뻗치는데

새하얗게 부서지는 갈망

그리움이 닿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낡은 전마선(傳馬船)이 어깨를 비비며

잠을 뒤척이는 새벽 네 시

우리가 지은 죄를 죄다 토해놓고

저 무수히 반짝이는 눈

별빛으로

어둠의 한켠에 내재율의 사랑을 모아본다

긴 호흡의 해저(海底) 일렁이는 침묵 속에서

만삭의 달은 갯벌에 달을 낳고

우리들의 가슴에도 포만의 달을 낳고

그리고 서서히 지워지는

안개의 꽃

 

2

누가 저렇게 마름다운 선(線)을 그어 놓았는가

팽팽한 수평선

생활의 목판화를 뜯어내면

그 뒤로 새로운 일과(日課) 한 장 일어서고

우리는 다시 삶의 작도(作圖)를 시작해야 한다

흉금을 털어놓듯

가슴의 대문을 활짝 열면

방금 튀어오른 생선 같은 싱싱한 아침이

죄 한 점 없이 걷혀지고

내항(內造에 갇힌 바다를 보듬고 돌아서면

살아있다는 의지가 용서한다는 의미일까

바람은 육중한 과제(課題 하나를

툭 던져준다

 

오늘도 바람은 갯벌로부터 불어온다

끊임없는 간섭(干涉)의 갯바람

머리칼을 쓸어 올리다가

문득 멈춘 갯바람에 뒤돌아보면

절반(半)의 바다

그 아스라한 그리움

 

 


 

 

권위상 시인 / 슈더에게

 

 

사람들은 네 목소리가 감미롭다 하더구다

아이스크림이 녹듯 혹은

가을 낙엽이 바람에 구르듯 그대 노래에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대 손가락을 연상한다

여섯 가닥 기타줄을 기막힌 기교로 뜯어내는

그리하며 공허한 소년의 가슴에 서정을 채워주던

그대 안경너머 근시안 시력이

어디에 찔려 피가 날까 두려웠다

노타이나 진바지의 남루한 자유가

테러나 폭행, 납치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군중 앞에 당당히 선 그대

반전(反戰)의 평화적 시위에 앞장서서

기아와 빈곤을 호소하고

그때 우리는 그대 노래만큼 파아란 사상에

가슴 깊이 사랑을 싹 틔웠지

이후 우리는 성장하며 가정을 갖고

직장을 갖고

일상에 충실하려 애를 쓰며

주식이 얼마나 올랐을까 걱정하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전쟁을 무수히 치렀지

 

어디서 쿠테타가 났을까

사람들은 다급하게 비명을 마구 뿌려놓고

나는 석간지를 황급히 찢어

스크립한다 뜻밖에

신문지 뒤에 반쯤 잘린 그대 얼굴이

우리들의 청년시절을 더듬게 하고

완벽한 늪에 빠진 듯

그 뒤로 하드록으로 바뀐 이 시대에

너는 허약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

뉴욕 어느 값싼 호텔 라운지에서

아직도 은은하다고 주장하는 네 목소리가

악보 따라 불리워지고 있겠지

슈더, 한때는 나도 무척 그대를 좋아했지

가사의 뜻도 모르고 노래를 따라 불렀지

지금 막 필요 없어 버려야 할

신문지 뒤의 잘린 네 모습에서

살아있다는 막연한 생의 애착이

오뉴월 광장의 분수처럼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다

 

 


 

 

권위상 시인 / 겨울 강

 

 

잠은 숲의 심연(深淵)에서 빠져나와

불면의 마침을 흔들어 깨운다

멀리 석기시대로부터 뚜렷한 강의 흔적

하늘로 뻗어있고

강을 누르는 북직한 정적을 비집고

무명의 새가 낳게 하강한다

우리가 이른 아침잠을 털어내고

다시 출발을 준비하는 겨울아침

누구와 함께 거닐면 외롭지 않을까

젖은 모음(母音) 하나 아, 하고

계곡에 던지면

겨울 산은 조금씩 흔들리다

쪼개져 방울방울 구르는 눈물을 뿌린다

눈이 내린다

미덥지 못한 계절의 끄트머리에서

다시오마, 약속하지 못한 슬픔이

수직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떨어지고

보였다가 다시 사라지는 길처럼

운명은 처음부터 예측치 못했던

그리하며 내내 한쪽으로만 흘러야 하는

그대 겨울 강은 마직 숲의 가슴이다

 

 


 

권위상 시인

부산에서 출생. 울산대학교 산업공학과 졸업. 1985년 <시문학> 주최 전국대학문예 입선. 2012년 《시에》로 등단. 현재 (주)예술과기술 대표이사.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