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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성훈 시인 / 양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1.

권성훈 시인 / 양파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바깥인 줄 몰라

문을 벗기면 창이 열리고 또 문으로 벗겨지는

중력 잃어버린 소문처럼 앞뒤가 섞이지도 않는

하늘 속 구름같이 통정 속 통점같이

서로 먼저 잊기 위해 눈물을 잘라내도

곧 사라질 예언은 축문도 없이 새겨지고

단단한 칼날 움켜쥔 신이라고

수화하는 눈을 떼지도 못하네

 

새어나가지 않는 고해성사의 부엌이여

당신과 함께했던 눈먼 몇 겹의 고백은

세기도 전에 눈물뿐이라서

세다가 돌아갈 방향을 잊으라

생이 새어 버렸네

 

계간 『시와 경계』 2021년 겨울호 발표

 

 


 

 

권성훈 시인 / 가발의 감정

 

 

한번 가면 아주간다는 아주대병원 사거리 성형외과 백 원장

아버지는 벗겨진 머리를 시멘트 칼처럼 빗고 다녔던 미장공이었다

 

5남매 기르며 실밥처럼 튀어나온 몇가닥 머리카락 빠질세라 꾹꾹 누르면서

내일이 자랄 틈 없이 오늘을 미장하는 지난한 노가다가 천직인 줄만 알았지

 

수첩에 이름 없고 성만 있는 김씨 이씨 박씨 최씨...

그렇지만 성은 없고 이름만 있는 백씨 자식들

욕부터 내뱉고 한숨이 따라오는 골몰한 일당의 성씨들과 함께 적힌

아버지만이 아는 흘림체의 땀방울같은 숫자들

흐린 날처럼 박혀서

 

아버지 돌아가시기 1년 전 가족들이 훈장처럼 여겼던 의사면허를 담보로 개업을 준비했던 백 원장의 대출 문턱은 다시 태어나야 헤어날 수 있다는 가난만큼 깊어가고

 

어느 겨울비 오던 날 일 없이 낮술에 취해 얼굴만큼 붉어진 머리를 내밀면서 아버지 가발 하나 사줬으면 좋겠다는 농담 섞인 아버지의 시린 말을 가시 돋친 말로 되받아치고 나온 저녁

 

물릴 수 없는 백 원장의 일기가 되었으므로

 

지금은 가발을 백 개라도 사줄 수 있다는 운구같은 저녁을 매고

억눌린 백씨 아버지 가발을 쓰고 다니는 성형외과 백 원장

글썽이는 눈빛으로 바르다만 뿌옇 시멘트 사이

물집 잡힌 생애 한가운데 마르지 않는 감정이 발진처럼 돋아나 있다

 

계간 『시와 경계』 2021년 겨울호 발표

 

 


 

 

권성훈 시인 / 행주가 잠이 들 때 당신은

 

 

이제야 움켜 진 속 내로 훔쳐낸 것들로 가득하지

허락 없이 안에 들었다가 나가버린

뜨겁거나 차가워서 날마다 무미건조한

비워지며 너를 지나갈래

쓸어내며 나를 채워줄래

매운 목줄에 묻힌 것을 사무치지 않게

빙글빙글 깊어진 반복 너머로 버려지고

아무도 궁굼 하지 않게 스며드는 졸음

위가 밑으로 밑이 위로 내리지

가지고 있지만 가질 수 없는

길이 난 하루 속도를 포개고 있어

눈가 날개를 접고 있는 마를 줄 아는 몸이라

울긋불긋 가려운 신경들이 사라진 그 자리

뼈대 없는 말처럼 모서리로 닳아가야 해

젖어 있는 허기를 닦아 내고

정직한 여백을 지키는 바닥은

쓰기 위해 있고 퇴고하기 위해 있나니

거기 누구야 그만 울어라

거역할 수 없는 공란을 남기고

어디쯤 흘러버린 구절을 찾으려다

고단했던 그 이름 낮은 대로 걸리고

한 끼 물기만큼 가난해 졌다

 

계간 『시작』 2021년 겨울호 발표

 

 


 

권성훈 시인

2002년 《문학과 의식》 시부문, 2013년 《작가세계》 평론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유씨 목공소』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과 편저『이렇게 읽었다―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등이 있음.  젊은 작가상, 열린시학상, 한국예술작가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이며 경기대학교 융합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