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허진아 시인 / 낙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1.

허진아 시인 / 낙화

 

 

의사가 나가자 남자가 소리친다

등산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게 낙인데 술을

끊으라니 살아도 죽은 목숨이라고

 

살아도 죽은 목숨의 남자가 있다

참척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허깨비로 사는

아버지가 있다

낙이 없어 목숨을 끊은 4월의 아버지가 있다

 

 


 

 

허진아 시인 / 피의 현상학

 

 

나보다 먼저 거울에 있는 나는 누굴까

 

비밀은 피야 피를 읽을 줄 알아야 해, 피에는 비어있는 페이지가 없지*

 

불만으로 꽃을 세는 건 슬픔 쪽으로 흐르는 피 때문일까 하나, 둘, 셋..... 시간의 멍 자국, 재스민 보라를 오래 쓰다듬다

 

행운목이 있는 곳 세상 안일까 바깥일까 행운이 운명이라면 내 피의 대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나를 싸고 있는 시간들. 이 슬픔 내 것일까

 

내 피에 펄펄 살아있는 페이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페이지]. 나는 나를 만다고 말할 수 있을지

 

시간이 몇 번 돌아 여기 있나 수많은 생일과 기일로 짠 무늬를 이번 生이라 할까 10년 100년 1000년 알 수 없는 시간을 지금 이 순간이라 할까

 

누군가 이곳에서 지는 꽃을 세고 비명 같은 새끼발가락으로 피를 읽었겠지 첨삭하며 속삭였을까 “우리가 너야"

 

두통이 어느 페이지에 있나 불면은 어느 페이지 첨삭인가

피로 살다 피로 죽는 것, 이걸 운명이라 해야 하나

 

내 피에 어떤 세리머니를 더할까

 

* 릴케, <단테의 수기>

 

-시집 『피의 현상학』 (2018. 6)에서

 

 


 

 

허진아 시인 / 돌을 깨는 인류

 

 

아이들, 맨발의 무릎을 세우고 망치를 내려친다

돌이 빵이 되는 일ㅡ 오래 전 神이 했던 일

경건하게 빵을 쪼갠다

 

애들아 네팔의 아이들이 돌을 깬단다 거긴 춥단다—— 돌 같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배시시 웃는 아이들,

 

비가 오면 주르르 돌산을 바라본다

허기를 때리는 비는 망치가 아닌데 왜 손가락이 아플까

손끝이 왜 허전할까

 

50만 년, 돌을 깨 세계를 연 인류

보이저 1호, 모차르트 '밤의 여왕'이 우주에 울려 퍼져도 돌을 깨는 인류

하루의 노동이 하루의 빵이 되는 인류

 

내일 비가 그칠 거예요 —— 쭉 그래왔으니까요

 

빵이 내일의 희망, 내일로 살아 죽지 않는 아이들이 밤에 돌을 깬다

내일 비가 올지 몰라요 — 쭉 그래왔으니까요

 

비처럼 벗은 아이들이 별을 쪼갠다

 

 


 

허진아 시인

1958년 광주 출생. 광주여고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졸업. 교사로 근무하다 군포 e비지니스 고등학교에서 퇴직, 2010년 『유심』 으로 등단. 시집 『피의 현상학』. 한국시인협회회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