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호 시인 / 또하나의 희망
하나뿐인 아이가 외로워 보인다 맨손으로 지뢰밭을 돌아다니는 주제에 몇 십년 후가 걱정스럽다니 때론 낙관적으로 변하는 내가 우습다 만세를 부르며 잠든 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난 모험을 하는거라 생각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주인공도 아니면서 수많은 행운을 필요로 하는 짓을 벌이다니 아내는 며칠째 몸살이다 혼자 자란 아이는 버릇 없대요 하나뿐인 희망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두운 밖을 살피고 문단속을 하며 난 생각한다 두번째 아이를 가지는 일이 또 하나의 희망을 품는 것이 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현관의 불을 끄면서 혹 돌아올지 모르는 고양이를 위해 문밖의 외등은 그냥 두기로 했다
-시집 <나에겐 아내가 있다>중에서
전윤호 시인 / 단단함에 대하여
가을 배추밭을 보면 안다 중심을 향한 마음이 겹겹이 뭉쳐진 것을 겉잎사귀 몇 상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헐값에 넘겨져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들 더러는 혁명을 품기도 하고 쿠데타를 품기도 하는 저 밭은 이제 겨울이면 버려져 눈을 맞으며 봄에 씨 뿌릴 사람을 기다릴 것이니 가을 배추밭을 보면 안다 내 안의 설움은 때를 기다리는 노란 고갱이라는 걸
전윤호 시인 / 역전
기차는 새벽에 떠나 열 십 자로 묶인 헛된 희망은 또 얼마나 많은 굴들을 지나갈까
이제 등 뒤엔 기다리지 않는 도시들만 있고 줄지어 매달린 서글픈 화물칸들
네 종착지는 어디니 오늘 밤 늙은 소처럼 소주를 마시면 이번 이별은 쉽게 건너갈까
전윤호 시인 / 아들의 나비
나는 여태 구두끈을 제대로 묶을 줄 모른다 나비처럼 고리가 있고 잡아당기면 스르르 풀어지는 매듭처럼 순수한 세상이 어디 있을까 내 매듭은 잡아당겨도 풀리지 않는다 끊어질지언정 풀리지 않는 옹이들이 걸음을 지탱해왔던 것이다 오늘은 현관을 나서는데 구두끈이 풀렸다며 아들이 무릎을 꿇고 묶어주었다 제 엄마에게 배운 아들의 매듭은 예쁘고 편했다 일찍 들어오세요 버스 정류장까지 나비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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