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정원 시인(담양) / 저녁 강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3.

김정원 시인(담양) / 저녁 강

 

 

해가 홍학의 다리 같은 임시고속도로를 낸,

바다에 민물을 수혈하는 강 하구는

바람이 우는 물결을 다리미질하고 지나간

색종이

 

그 푸르고 두꺼운 종이에

점자들이 볼록볼록 자맥질하며 문장을 쓴다

미끄러지듯이

 

손으로 만지려 하면

점자들이 푸드덕 날아가 버릴 것이기에

둑에 인기척 없이 흔들림 없이 고사목 되어 서서

눈으로만 그 흘러가는 문장에 밑금을 긋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좇아가며

여러 번 훑어보지만 도무지 해석은 잡히지 않고

 

다만 행간을 내 멋대로 읽은 뜻은

청둥오리들도 새끼들을 거느리고

시린 물에서 남모르게 쉼 없이 붉은 물갈퀴를 놀리며

무거운 어깨를 감당하려고 땀나게 뛰어다닌다는 것

잔잔한 삶에도 느닷없이 돌풍이 몰아치는 때가 있어서

긴장한 머리를 늘 바짝 쳐들고 물수리를 경계한다는 것

 

영락없이 사람 사는 모습이어서

한겨울이 차라리 따뜻하고 정겹고 가까운

풍경

 

바라보다

바라보다

강에서 임시고속도로가 가뭇없이 철거될 때까지

숨죽이고 빠져 있다가

 

갈대에게 거센 물살이 얼씬 못하게

물고기에게 세찬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이 유리를 평평히 끼워가고

 

모든 여백을 칠흑같이 빈틈없이 메꾼 어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어떤 눈시울은

숯불 벌건 황토아궁이처럼 오래 뜨겁다

 

 


 

 

김정원 시인(담양) / 진로 상담

 

 

실력은 충분하지만,

대학에 가지 않고

고등학교를 마치면 바로

취업하겠다는 자웅이와 상담을 했다

 

그가 대학에 매력을 갖지 못하는 까닭을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어떤 직장에 가면 좋겠냐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돈 많이 주는 직장도 찾지 마라

일하기 편한 직장도 바라지 마라

큰 자리, 높은 자리 제의하는 직장도 마다하라

정당하게 일하고 떳떳하게 대가 받는 일터

남들이 가기 꺼려하는 일터

네 능력이 100이라면 70을 요구하고

쉼과 창조의 공간인 30의 여백이 있는 일터

그 무엇보다도 이웃이 꽃이고

그 꽃이 농사꾼이면 득달같이 달려가라

 

사족 같지만,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나는 농민을 교수보다 더 존경한다

너도 농민이 되면 좋겠다

참된 그는 자본을 뛰어넘은

우리 시대 마지막 시인 철학자이고

농업은 인류의 시작이고 끝이니까

이보다 중하고 무궁한 직업이 있겠니?

 

 


 

 

김정원 시인(담양) / 정말 개 같다

 

 

개를 보면 웃자

웃어야 한다

다정히 웃지 않으면

목이 잘린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고급빌라

주인집 개를 보고도

반갑게 굴지 않고 개 보듯 해

경비직에서 쫓겨난 아저씨

 

어렵사리 다시

대치동 고층아파트 경비가 되어

개를 보면 꼬리친다

살갑게 볼을 부비며 꼬리친다

또 목이 달아나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웃으면서

 

왈왈 왈왈왈, 까꿍!

 

 


 

김정원 시인(담양)

1962년 전남 담양 출생. 전남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졸업. 2006년 『애지』로 등단. 시집,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 『줄탁』 『거룩한 바보』 『환대』 『국수는 내가 살게』 『마음에 새긴 비문』 등이 있다. 전남 담양 한빛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