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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유리 시인 / 누란 가는 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8.

조유리 시인 / 누란 가는 길

 

 

이 길을 감고 푸는 동안

내 몸에는 실오라기 한 올 남지 않았네

바늘귀에 바람의 갈기를 꿰어

길게 박음질한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는 저녁

봄 바깥으로 향한 솔기부터

올을 풀기 시작하네

 

바람이 모래구릉을 만들어 낙타풀을 키우는 땅

결리고 아픈 생의 안감을 뒤집어보면

천 년 전 행성이 반짝 켜졌다 사라지곤 하네

계절 품은 고름을 풀어 우기를 불러오고

 

초승달을 쪼개 먹다 목에 걸려 운 밤

캄캄한 잠실(蠶室)에 엎드려

산통을 열어 한 사내를 풀어 주었네

수천 겹 생각의 올이 봄에서 풀려나갈 때

내 살아 온 시간 다 바쳤어도

바람을 동여매지 못하리란 걸 알았네

 

내 몸속엔 이 지상에 없는

성채가 지어졌다 허물어지고

폐허가 된 태실(胎室)속

 

목숨을 걸고 돌아 갈 지평선 한 필지 숨겨두었네

 

-2008년 <문학 선 > 신인상 수상작 (당시 필명 유리아)

 

 


 

 

조유리 시인 / 징잡이

 

 

쇠가 우는 것을 보았다. 명치 한복판을 헐어

골 깊은 수렁 온 몸으로 안아내고 있는 사내

그러니까 저 사내는 칭칭 동여매진 손아귀 힘으로

돋을새김 된 울음의 무늬를 변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제 심장부를 오래 에돌다 터져 나오는

상처의 결을, 해왕성* 그늘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고도로 숙련된 꾼의 울대에서라야 완성된다는

울음잡기*, 그러니까 놋쇠덩이는 십리 밖으로 파동 쳐 갈

젖은 음역의 전생인 것이다 그것은 태생 이전부터

사내의 지문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

 

쇠가 운다 피돌기를 따라

파문이 번진다 상모를 돌리는 상쇠처럼

어지럽다 가슴이 함몰된 깊이만큼 여울이 생기고

바람이 쇳물을 길어 나르는 동안

 

어떤 緣은

한 세계의 테두리를 오래 맴돌다

서로의 눈빛을 알아보지 못한 채 거두어 진다

관계와 관계 사이의 간극이란

일백솜이 동공이 피었다 지는 동안

헐린 허공의 문이다

 

일생동안 그 문 한 축 일으켜 세우기 위해

사내는 가슴뼈를 다 탕진했다

 

*해왕성 -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으로 햇빛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나 내부에 뜨거운 열원을 갖고 있다.

*울음잡기- 징의 소리를 마지막 조율하는 과정으로 울음을 잡는 사람은 최고 기술자가 담당한다.

 

-2008년 제15회 시산맥상 수상작

 

 


 

 

조유리 시인 / 붉나무의 계절

 

 

부러진 손톱 끝에서 기침이 터져 나온다

여기는 내부를 다 후벼 파낸

바람의 허파 속

드나드는 숨소리 거칠어 산목숨도

제 혼을 알아볼 수 없는 시간이다

붉다거나 푸르다거나 하는 것은

나를 아주 놓아버리기 이전의 자기최면

 

밭은기침처럼 참혹하지, 사랑은

흉부에 몇 마리 새들이 놀다가는 동안

 

헛것처럼 알을 품고

된장국을 끓이고

속눈썹을 질끈 조였다 풀었다 하는 동안

 

나무가 뱉어 낸 꽃들이

사지에 비릿한 체온을 바른다

 

이 계절 발열하는 소름 시퍼런 3월의 부적이다. 나는

 

-계간 문학선> 2009년 봄호

 

 


 

 

조유리 시인 / 복상사

 

 

 오르는 것만으로도 한 오백 년 걸렸는지 몰라, 환장하게 숨이 차는 거라 연장은 가파르고 나의 노동은 꽃살문짝 젖히려다 꽃날을 삼킨 거라 생사가 용접된 순간을 수습하기 위해 모퉁이 드러난 그믐달을 지목하거나 까진 무르팍에 옹송그린 몇 개의 기호들을 염탐해 보지만 접신 쩍 들러붙는 순간 천공을 틀어막은 벼랑을 천기누설죄에 봉할 것인가 왼손과 오른손, 갈빗살과 갈빗대를 끊어 노를 저은 하룻밤 행적은 수족이어서, 한 몸의 동의어라서

 내 배꼽 위에 방사된 언어들로 나는 영영 블라우스 단추를 여밀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거라

 

-계간 <미네르바>2009년 여름호

 

 


 

 

조유리 시인 / 사바사나(Shayasana)

 

 

죽음을

개었다 다시 펼 수 있나

깔았다 다시 개어 윗목에 쌓아두고

 

목숨을 되새김질해 보는 체위

숨골이 열리고 닫히는 허구렁에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나로부터 나 조금 한가해지네

 

감은 눈꺼풀을 디디며

천장이 없는 사다리가 공중을 빗어 올리고

 

목덜미로 받아 낸 악장의 형식으로

죽음을 게송 해도 되는 건가

백 개의 현을 건너 걸어나간

먼 저녁이 되어

 

이 세상 계절을 다 물리고 나면

어느 사지에 맺혀 돌아오나 다시

누구의 숨을 떠돌다

바라나시 강가(Ganga)에 뛰어드는 바람이 되나

뜬 듯 감은 듯 어룽어룽 펄럭이는

눈꺼풀이 산투르 가락을 연주하는 동안

 

어제 아침 갠 이부자리가 내 숨자락을 깔고

기웃기웃 순환하는 동안

 

-웹진 『문장』 2010년 7월호

 

 


 

조유리 시인

1967년 서울에서 출생. 2008년 상반기 《문학·선》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흰 그늘 속 검은 잠』(시산맥, 2018)이 있음. 제15회 시산맥상을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시에티카>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