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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온리 시인 / 영웅시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8.

김온리 시인 / 영웅시대

 

 

 영웅이 나타나기 전에 무슨 구름이 흘렀던가 폭우 속 울고 있던 아이의 손을 잡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준비가 되었던가 우리들의 세계는 이제 두근두근해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고장 난 시계의 시침 위에서 두리번거리듯 영웅이 손을 내미는데 손금이 아직도 자라는 중이라는 걸 믿어도 되는 걸까 폭우는 폭설처럼 쌓이지 않아서 영웅은 그저 영웅인 채로 비를 맞고 서 있을 뿐, 허밍 소리는 그 무렵 마법처럼 흘러나왔다 내가 영웅을 알아보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영웅을 에워쌌지만, 패인 손금 위로 흐르는 빗물은 영웅과 나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 영웅이 없는 시대라서 영웅은 별로 빛나고, 오늘 밤 휘파람을 부는 영웅의 바깥에서 나는 조용히 늙어가기로 한다 영웅은 그저 영웅인 채로 내 방 창가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폭우로 왈칵 쏟아질 것이므로

 

 


 

 

김온리 시인 / 개기월식

 

 

 우물을 길어 올리다가 첨벙, 뛰어든 날이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직의 낙하, 컴컴하고 까마득한 수렁에 내가 고여 있었다 그 겨울, 입은 봉인되고 이끼의 시간 안에서 몸은 축축해졌다 동그란 하늘에 떴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지만 누구도 내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어둠이 머리카락처럼 자랄 때마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푸른 하늘로 두레박을 던졌다 푸드덕, 한 무리의 새가 창공을 날았다 붉게 번지는 울음소리로 달의 뒷면까지 가 닿고 싶었던 걸까

 

 지금도 가끔 우물에 빠지는 꿈을 꾼다 당신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그런 날, 물푸레나무로 만든 두레박이 당신의 미간에 걸린다

 

 


 

 

김온리 시인 / 구름과 비 사이

 

 

구름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구름을 기록하는 저물녘이 되면

느릿느릿 흩어지는 구름,

눈동자 안으로 내려 앉는다

 

거울 속의 내 눈을 바라보는 건

어제의 우울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일

딱지 지지 않은 상처를 긁어대는 일

 

한 구름이 흘러 다른 이름의 구름이 된다

 

매듭지어지지 않는 경계 속에서

당신이었다가 나였다가 끝내는 돌아앉은 입술

 

입을 벌리니 마술사처럼 줄줄이 구름이 풀려나온다

흉터가 분명할수록 뭉텅뭉텅 피어오른다

 

젖은 바람으로 천천히 뭉쳐지는 구름의 내부에는

목이 길어진 얼굴이 있다

 

 


 

 

김온리 시인 / 모자

 

 

어떤 날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 어떤 날은 베고니아 꽃이 피어나는 화분, 어떤 날은 비둘기가 나오길 기대하지만

 

그냥 가면일 뿐이야

 

하고 싶은 말들이 쌓여 빙빙 자라는, 때론 햇살에 휘감겨 젖은 상처 드러내는 모자의 챙

 

무표정한 얼굴처럼 모자를 날리면 꺽꺽, 참았던 울음이 터질지도 몰라 울음 끝이 길어지면 가면이 벗겨진다는데

 

더 깊이 눌러 쓴 모자 속을 더듬어보면 꼬리 잘린 울음 한 올 건져낼 수 있어

 

모자 속에서는 모자만 걸어 나오지

화려하게 날아오르는 나비를 꿈꾸지만

한쪽 눈을 가린 모자일 뿐이야

 

 


 

 

김온리 시인 / 박쥐

 

 

울 때마다 귀가 자란다

귓바퀴에 고인 울음이 기별처럼 퍼져나간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누군가의 어깨처럼

왼쪽 날개만 펄럭거리며

날아오를 태세로 밤은 깊어간다

 

내 사랑은 번번이 밤하늘을 놓쳤다

 

펄럭일수록 인기척이 멀어지는,

거꾸로 매달린 꿈

 

동굴의 천정에서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정지된 풍경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움이란 스틸 컷 같은 시간 속에서 홀로 미끄러지는 일

 

눈을 문지르면 반쯤 저문 얼굴이 다가오는 소리,

날개를 접고 다시 종유석의 자세가 된다

 

뱀파이어의 핏기 없는 입술처럼

먼 곳,

꽃이 지는 소리에도

당신을 깊숙이 빨아들인다

 

 


 

 

김온리 시인 / 손톱

 

 

잃어버린 말이 입술 주위를 맴돌았다

얼굴이 희미해졌다

돌아서는 어깨가 삐걱거렸고 충혈된 악수는 생략되었다

사진이 찢어지는 쪽으로 바람이 불었다

깨진 액자를 밟고 걷다가 멈추면 벼랑 끝이었다

뛰어내렸다가 깨어나면 이만큼 자라나 있는 손톱,

손톱의 방향에 대해 오래 골몰했다

발작 난 손톱 위로 순한 눈이 쌓이고,

내 것인지 아닌지

물어뜯는 습관은 그때부터였다

 

 


 

김온리 시인

부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졸업. 서울 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수료. 2016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비야, 부르면』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