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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숙영 시인 / 연필의 노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9.

김숙영 시인 / 연필의 노래

 

의미 없이 만지지 마세요

난 흑심을 가지고 있어요

본 대로 말하는 것보다

안 본 것까지 이야기하는 방식을 좋아해요

알리바이를 꾸밀까요

몽타주를 내밀까요

낮의 초현실주의나

밤의 상징주의를 이젠 뛰어넘고 싶어요

처음부터 나는 쓱쓱과 싹싹을 품었어요

빨리 백지를 주세요

예상하지 못한 문장을 천천히 적어 내려갈 테니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술술 자백을 뽑아낼 테니

당신은 언제나 주인공만 하세요

멋진 프롤로그를 가지고 있는 스타가 되세요

악역은 전부 내가 할래요

나쁜 건 내가 다 뒤집어쓸래요

그렇다고 무시하거나 다그치진 말아요

욱하는 순간 부러질지 몰라요

육하원칙을 지키면서

본질만을 제시할지 몰라요

어젯밤 당신은 독주를 앞에 두고 일탈을 꿈꿨지요

나의 용도를 바꾸려고 마음먹었지요

그런 뻔한 유언은 사양할래요

너무나 끔찍한 사실주의 같잖아요

그러니 내가 닳아져 없어질 때까지

무조건 뒤틀린 당신을 쓰고 또 쓰세요

 

 


 

 

2019년 계간 <열린시학> 신인 작품상

김숙영 시인 / 트라우마

 

 

되돌이표가 자꾸 상징으로 돌아선다

상징은 늘 소녀와 동행을 하고

교복을 입은 채

풍덩, 우물 바닥을 향해 그림자를 밀어 넣는다

바닥에 붉은색이 퍼지면

오래전 죽은 짐승이 어둠을 빠져나온다

짐승의 갈라진 혀가 다리를 휘감고

스스로 혀를 잘라버린다

아, 짐승이 낳은 아이는 자궁 속에서

30일을 채우지 못했는데…

끈적이는 혀를 달고

소녀는 눈부신 지옥을 다녀와야 했다

사람을 믿느니 차라리 소문을 믿어야 했을까

형태를 갖지 못한 눈 코 입

성큼 달아나고 싶었을 거다

안쪽을 들킬 것만 같아

몰래 짐승을 가두고만 있었다

우물의 눈동자가 계속 따라 다녔다

처음 어미가 된 자의 기분과

마지막까지 독백을 삼키던

짐승의 숨소리가 질척였다

짓무른 기억이 가득 고인 우물

상처를 게워낸 흔적 때문에

샘물은 더 이상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다

달빛이 흥건하게 쏟아져도

낙인처럼 화냥이 머물다갔다

두 손으로 죄인을 가린 채 주저앉는다

그리고 매일 밤, 짐승을 죽이는 꿈을 꾼다

 

 


 

 

김숙영 시인 / 저수지

 

 

멀어질수록 곡소리는 등에 더 가까워진다

그믐을 집어삼킨 전설이

포물선으로 재주를 넘으면

집으로 가는 길, 속도는 느리다

연인을 잃은 연인이

쓱 나타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주문을 걸며

등에 돋아난 생 비늘을 긁을 것만 같다

버드나무가 귀를 열고

수면 위를 치렁치렁 더듬는다

더욱 예민해지는 발목들

기척 하나 하나가 징후가 된다

입을 벌린 아가리에서

잠든 시간을 걷어내면

비밀은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안목이 된다

비가 올 땐 더 더욱 앞만 봐야한다

귀신새 울음소리에 속아 뒤돌아보면

수몰 된 마을을 감당해야 한다

언젠가 저수지가 바싹 마른 것을 본적 있다

쩍쩍 갈라진 실핏줄마다

녹아내린 흔적이 있고

공생하던 모든 것들이

진흙 속에 파묻혀 숨죽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서 곡소리의 출처를 찾아야하나

당산나무 아래 시간이 매몰된 자리

죽은 전설이 내 발목을 붙잡을 것만 같다

치렁치렁 이끼를 덮고 있는 두려움

떼어낼수록 끝까지 달라붙는다

 

 


 

 

김숙영 시인 / 입술의 기억

 

 

쉽게 무너지지 않아

오늘보다 단단한 어제

당신은 어제 속에 있으니깐 괜찮아

12시 20분에 우린 가쓰오 우동을 먹었겠지

입안에 번지는 문어향

난 한 번도 입술을 추궁한 적 없는데

자꾸 12시 20분만 되면

내가 당신을 반복되고 있어

당신과 나의 차이는

국물과 바닥의 차이야

관계의 안쪽까지

후루룩 마시고 싶어서

키스할 때마다 눈을 뜰까 말까 고민했지

무너질까 겁이 난 게 아니라

보여줄 수가 없던

기척이 들킬까봐 설레었지

묵호역 근처 우동집엔

속삭임만 남겨 놓고 싶었는데

귓속에 왜 파란이 밀려와 고였는지 몰라

고백은 액체일까 고체일까 아니면 기체일까

이젠 고민할 필요 없어

어느새 고백은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으니까

결코, 쉽게 발각되지 않아

어제보다 낯설어진 오늘

떠난 당신은 끝끝내

처음 속에만 있을 테니까

 

 


 

 

김숙영 시인 / 나만 아는 판도라 상자

 

 

당신을 향한 검은 꽃이

봄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요

첫이 마구마구 쏟아져요

절벽 위는 안녕하신가요

암자도 삼백년

나무도 삼백년

줄기의 숨을 먹고 자란 허공의 의지가 만져져요

불멸이 존재할 거라고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어요

위태로운 건 언제나 의심일 뿐이지요

품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바람의 경전

흩날린 문장에서

당신의 고도가 느껴져요

가장 낮은 곳에서 바닥처럼 살았으니

가장 높은 곳에서 허공처럼 비워내겠다 했었지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새나 구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날은 새가 안부를 물어오고

어느 날은 구름이 마중을 나와요

오늘도 하루에 한 번

당신이 있는 쪽을 향해 우두커니가 됩니다

이것이 나만 아는 판도라 상자의 비밀

우리만 아는 처음과 끝

제가 다녀갈 때까지

연기(緣起)의 수레바퀴만은 끊지 말아주세요

 

 


 

김숙영 시인

2019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등단. 2021년 제15회 바다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