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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소연 시인 / 무등(無等) 가는 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9.

백소연 시인 / 무등(無等) 가는 길

 

 

은사시나무 군무에 둘러싸인

생각의 우듬지가 사정없이 펄럭입니다

무등 깊은 산,

문이 열릴 때마다 억새들 속울음

비탈길로 휘몰아칩니다

거문고가 된 내 몸은

말의 언어를 몸에 맡겼습니다

목놓아 흔들리며 떠나는 것이 어찌 저들뿐이겠습니까만

칼보다 강한 문장들은 뿌리 끝에 내려앉고

흔들리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눈치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 저문 능선을 타고

한 호흡, 한 허리로 걷는 길이 이토록 찬란할 수 있을까요

이 산 저 산

제멋대로 풀어놓은 미치광이 칼바람 헤쳐나오며

생생 비상하는 텃새들,

저들 또한 다가올 내일을 위해

기다림에 못 박혀 산다는 말 굳게 믿어집디다

 

 


 

 

백소연 시인 / 김씨네 철물점

 

 

고장 잦은 기호, 아무도 읽어내지 못했다

얇아진 종잇장 물체 짚어나가다 보면

무던히 견딘 흔적 역력하다

척추 휘고 골절된 잡동사니 너절한 점포에 쭈그리고 앉아

헐거워진 생 조립하다 어긋난 너트 들여다본다

부스러진 관절 부위 수리해 조목조목 끼워 맞춘 그림자

기울어진 뼈마디와 관 속에 갇힌 먼지 긁적거려

부활의 몸 재가동시켜보면

손닿지 않아 녹슨 生 그늘 깊다

 

그때

산부인과분만대기실에누워있었지

신원불명칠삭동이가인큐베이터도없이엄마손기다리며

까만눈동자껌뻑거렸어어둠올때까지간호사는귀퉁이움켜쥔

아이를 건너고건너다녔지철꺽철꺽,군화같은가위소리몰려오고

소독안된배꼽울음움켜쥐던갓난아이는

딸꾹질나는심장통째드러낸채희고얇은싸게붕대처럼감고

乳腺도없이어른들노크했어목메이도록시선은오지않고

요람없는저녁째깍째깍길떠난

이튿날새벽,아이는어느행성에도달했을까

 

헐거워진 기형의 골절상 아물지 않아

끊겼다 덧붙인 이음새 눈치챘으므로

쥔장은 흘끔, 은박 아로새긴 어떤 품목의

크기와 넓이 높이와 무게 우주 저편까지 펼친다

좌우 견적내며 오래 전 내가

말없이 걸어 나갔음에 대해 일목요연한 사용증명서 전개한다

광채 속에 잠식된 기능과 아귀맞춘 나사와

물줄기 선명했던 홋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수로 차단하기 전까지 손닿지 않은

길, 익숙하고 헐거워진 것으로부터 눈 깜짝할 새

하나 둘 작별을 선고 중이었을까

뒷목 치는 삐걱거림과 관절통증과 복숭아뼈의 절뚝거림에 대해

아득해진 무관심 경계 조명 중이다

소중한 것일수록 언제나 멀리 눈 뜨는 것이므로

반추된 기의와 기표

제 격 찾아 젖은 문장 조립 중이다

 

 


 

백소연 시인

고려대학원 문학석사 졸업.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바다를 낚는 여자』, 『페달링의 원리』  등이  있음. 시나리오: 『궁안의 연꽃』집필. 『월간 아동문학』 운문부 신인상 수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 『대한민국월간아동문학상』 수상. 현)시인, 극작가, 칼럼니스트 외 뮤지션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