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성혜 시인 / 도대체 뭐란 말인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9.

이성혜 시인 /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묵은 신문지 같은 하늘이 뭉개져 내리고, 그 틈새로 찐득한 시거내가 배어날 것 같다고 인텔리겐차 인텔리겐찌야 토스토예프스키 혁명 전복……을 떠올릴 필요는 없는 거다

 

정동길, 생각하는 사람이 팽팽 소리를 지르며 팽창한다

턱이 뾰족한 청년이 제인 에어 포스터를 보며 씨네큐브 앞을 서성인다, 닿지 않는 바닥을 향해 종일 망치질 해대는 사람의 화두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광화문 대형 문고 글판에 눈을 두고 있다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군화소리 요란하게 빗방울이 진격해 온다

 

우산을 든 여학생이 편의점에서 나오고

하늘, 작은 창에 해바라기 세 송이 피어오른다

오드리 헵번에게서 우주를 봤다는 카쉬, 사진전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행인이 눈썹 없는 빌딩에 물폭탄을 맞는다

적선동, 이층 카페에 앉자 창 너머로 폐비닐조형물이 보인다

 

조형물인줄 알았던 비닐더미 속에 쪼그라진 노점상 얼굴이 보인다고 인텔리겐차 인텔리겐찌야 체 게바라 윤동주 이상 해방……을 떠올리지 않을 이유도 없는 거다

 

 


 

 

이성혜 시인 / 비워진 여자─비어있는 남자

 

 

다 마셔버리면 어떡해요. 현실이 눈을 뜬다, 물박물관 앞을 서성이다 누군가 내민 생수를 받았지, 통속 얼음이 더그럭 웃었어

 

그는 타라 했고 나는 걸었다

자전거바퀴에 달빛이 휘감긴다, 가로등 불빛이 찢겨나간다

느리게 걷는 어둠 속으로 택지개발예정 지구가 사라진다

 

그가 내민 비뇨기과의원 부채로 팔락팔락, 바람처럼 묻는다

비워진다는 게 어떤 건지 아세요?

 

알죠, 비-인 진찰실, 대기실, 허울뿐인 집,

전, 사람 체온 남은 병원에 늦게까지 남아있어요, 덜 외롭거든요

 

체온? 그 몸, 말하는 거 아닌데!

비어있는 거 말고 비워진 거 말에요

 

그게 그거지요, 비워졌으니까 비어있는 거지요.

 

이어지는 대화가 두 시간의 쓸쓸함을 덜어냈다

 

밤이, 얽혀있는 모든 직선-곡선과 의식을 단순화 시킨다, 생소한 짓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2012.계간<작가들>겨울호.)

 

 


 

이성혜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국문학사. 2010년 계간 《시와 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