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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춘화 시인 / 어느 날 넝쿨장미처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8.

한춘화 시인 / 어느 날 넝쿨장미처럼

 

 

나는 상자 안에서 시작되었어요

방울뱀 소리를 수집하는 귀는

엄마가 아기 상자에 넣던 그 날

울던 빗소리에 뾰족하게 자랐어요

세상에 나오며 딴 급수

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 1급 시각장애 1급

 

그림자 없는 방 안에

마른 인형처럼 눕히면

몇 년도 그대로 있을 수 있어요

누운 자리 그대로 살이 삭고 흰 뼈가 드러나

뱉지도 삼키지도 못해 뿌리내린,

복지시설 맨 끝 방에

기록으로 존재해요

꽃이 무엇인지도 몰라요

꽃 안 피는 시절이라고 우는 당신은

많이 반성하세요

무채색 위에 핀 얼룩 같은 방에서

통점으로 이루어진 몸 가진 나도 있어요

 

흰 사이즈 작은 방으로 가는 길

봉사자 등에 축 늘어진 머리가 흔들리는 것이

담장을 갓 넘은 넝쿨장미 같다는데

좋은 말 같아 웃었어요

사람이 늘 때마다 작아지는 내 방

 

오늘은 나를 꼭 맞는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어요

잊고 살아도 된다는 얘기이기도 해요

상자에 넣는 건 중요한 것이나

필요치 않아 오랫동안 치워두는 것이래요

엄마는 중요한 나를 상자에 넣어 놓고

어느 상자인지 몰라

여태 뒤지고 있는지도 몰라요

 

엄마는

상자를 열어보기나 했을까요?

 

ㅡ 제7회 홍완기문학상 수상작

 

 


 

 

한춘화 시인 / 월광 소나타

 

 

자목련의 그늘이 붉다

생리를 시작한 후

자목련을 구독했다

 

사랑을 하는 것은

볕살에 눈을 뜨는 꽃잎 같다

인연을 하나의 그림자로 겹칠 때

아이가 피었다

 

밤새 무성해지는 나뭇잎 같은 절기도

폭우 쏟아지는 생계도

달콤한 밀어 같은 꿈도

손금에 다 새기고

붉고 비린 것 모두 진 후

먼 곳에서부터 살아남은 완보동물같이

연대기를 이어갈 생에 연주

뒤돌아본다

육십 년을 왔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기웃거리는 일이기도 해서

목덜미에 서늘한 바람 서릴 때

땅에서 고스라 진 자목련

 

달빛이 환하다

 

 


 

 

한춘화 시인 / 겨울 강

 

 

몹시 추운 날이면

 

물살이 물살을 만나

서로 껴안기

시작한다

 

단단하게 부둥켜 안고

벽을 만들어

몸으로 버티는 중이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강물 속

물고기 얼지 않는

까닭이다

 

해도 붉은 얼굴로 지나갈뿐

숭고한 포옹을 함부로

열지 않는다

 

-작가와문학 2019 봄여름호 발표

 

 


 

한춘화 시인

2007년 《시선》 신인상으로 등단. 제8회 홍완기 문학상 수상. 현재 도예가. 〈마음의 행간〉동인, 〈시산맥〉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