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춘화 시인 / 어느 날 넝쿨장미처럼
나는 상자 안에서 시작되었어요 방울뱀 소리를 수집하는 귀는 엄마가 아기 상자에 넣던 그 날 울던 빗소리에 뾰족하게 자랐어요 세상에 나오며 딴 급수 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 1급 시각장애 1급
그림자 없는 방 안에 마른 인형처럼 눕히면 몇 년도 그대로 있을 수 있어요 누운 자리 그대로 살이 삭고 흰 뼈가 드러나 뱉지도 삼키지도 못해 뿌리내린, 복지시설 맨 끝 방에 기록으로 존재해요 꽃이 무엇인지도 몰라요 꽃 안 피는 시절이라고 우는 당신은 많이 반성하세요 무채색 위에 핀 얼룩 같은 방에서 통점으로 이루어진 몸 가진 나도 있어요
흰 사이즈 작은 방으로 가는 길 봉사자 등에 축 늘어진 머리가 흔들리는 것이 담장을 갓 넘은 넝쿨장미 같다는데 좋은 말 같아 웃었어요 사람이 늘 때마다 작아지는 내 방
오늘은 나를 꼭 맞는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어요 잊고 살아도 된다는 얘기이기도 해요 상자에 넣는 건 중요한 것이나 필요치 않아 오랫동안 치워두는 것이래요 엄마는 중요한 나를 상자에 넣어 놓고 어느 상자인지 몰라 여태 뒤지고 있는지도 몰라요
엄마는 상자를 열어보기나 했을까요?
ㅡ 제7회 홍완기문학상 수상작
한춘화 시인 / 월광 소나타
자목련의 그늘이 붉다 생리를 시작한 후 자목련을 구독했다
사랑을 하는 것은 볕살에 눈을 뜨는 꽃잎 같다 인연을 하나의 그림자로 겹칠 때 아이가 피었다
밤새 무성해지는 나뭇잎 같은 절기도 폭우 쏟아지는 생계도 달콤한 밀어 같은 꿈도 손금에 다 새기고 붉고 비린 것 모두 진 후 먼 곳에서부터 살아남은 완보동물같이 연대기를 이어갈 생에 연주 뒤돌아본다 육십 년을 왔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기웃거리는 일이기도 해서 목덜미에 서늘한 바람 서릴 때 땅에서 고스라 진 자목련
달빛이 환하다
한춘화 시인 / 겨울 강
몹시 추운 날이면
물살이 물살을 만나 서로 껴안기 시작한다
단단하게 부둥켜 안고 벽을 만들어 몸으로 버티는 중이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강물 속 물고기 얼지 않는 까닭이다
해도 붉은 얼굴로 지나갈뿐 숭고한 포옹을 함부로 열지 않는다
-작가와문학 2019 봄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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