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리 시인 / 누란 가는 길
이 길을 감고 푸는 동안 내 몸에는 실오라기 한 올 남지 않았네 바늘귀에 바람의 갈기를 꿰어 길게 박음질한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는 저녁 봄 바깥으로 향한 솔기부터 올을 풀기 시작하네
바람이 모래구릉을 만들어 낙타풀을 키우는 땅 결리고 아픈 생의 안감을 뒤집어보면 천 년 전 행성이 반짝 켜졌다 사라지곤 하네 계절 품은 고름을 풀어 우기를 불러오고
초승달을 쪼개 먹다 목에 걸려 운 밤 캄캄한 잠실(蠶室)에 엎드려 산통을 열어 한 사내를 풀어 주었네 수천 겹 생각의 올이 봄에서 풀려나갈 때 내 살아 온 시간 다 바쳤어도 바람을 동여매지 못하리란 걸 알았네
내 몸속엔 이 지상에 없는 성채가 지어졌다 허물어지고 폐허가 된 태실(胎室)속
목숨을 걸고 돌아 갈 지평선 한 필지 숨겨두었네
-2008년 <문학 선 > 신인상 수상작 (당시 필명 유리아)
조유리 시인 / 징잡이
쇠가 우는 것을 보았다. 명치 한복판을 헐어 골 깊은 수렁 온 몸으로 안아내고 있는 사내 그러니까 저 사내는 칭칭 동여매진 손아귀 힘으로 돋을새김 된 울음의 무늬를 변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제 심장부를 오래 에돌다 터져 나오는 상처의 결을, 해왕성* 그늘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고도로 숙련된 꾼의 울대에서라야 완성된다는 울음잡기*, 그러니까 놋쇠덩이는 십리 밖으로 파동 쳐 갈 젖은 음역의 전생인 것이다 그것은 태생 이전부터 사내의 지문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
쇠가 운다 피돌기를 따라 파문이 번진다 상모를 돌리는 상쇠처럼 어지럽다 가슴이 함몰된 깊이만큼 여울이 생기고 바람이 쇳물을 길어 나르는 동안
어떤 緣은 한 세계의 테두리를 오래 맴돌다 서로의 눈빛을 알아보지 못한 채 거두어 진다 관계와 관계 사이의 간극이란 일백솜이 동공이 피었다 지는 동안 헐린 허공의 문이다
일생동안 그 문 한 축 일으켜 세우기 위해 사내는 가슴뼈를 다 탕진했다
*해왕성 -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으로 햇빛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나 내부에 뜨거운 열원을 갖고 있다. *울음잡기- 징의 소리를 마지막 조율하는 과정으로 울음을 잡는 사람은 최고 기술자가 담당한다.
-2008년 제15회 시산맥상 수상작
조유리 시인 / 붉나무의 계절
부러진 손톱 끝에서 기침이 터져 나온다 여기는 내부를 다 후벼 파낸 바람의 허파 속 드나드는 숨소리 거칠어 산목숨도 제 혼을 알아볼 수 없는 시간이다 붉다거나 푸르다거나 하는 것은 나를 아주 놓아버리기 이전의 자기최면
밭은기침처럼 참혹하지, 사랑은 흉부에 몇 마리 새들이 놀다가는 동안
헛것처럼 알을 품고 된장국을 끓이고 속눈썹을 질끈 조였다 풀었다 하는 동안
나무가 뱉어 낸 꽃들이 사지에 비릿한 체온을 바른다
이 계절 발열하는 소름 시퍼런 3월의 부적이다. 나는
-계간 문학선> 2009년 봄호
조유리 시인 / 복상사
오르는 것만으로도 한 오백 년 걸렸는지 몰라, 환장하게 숨이 차는 거라 연장은 가파르고 나의 노동은 꽃살문짝 젖히려다 꽃날을 삼킨 거라 생사가 용접된 순간을 수습하기 위해 모퉁이 드러난 그믐달을 지목하거나 까진 무르팍에 옹송그린 몇 개의 기호들을 염탐해 보지만 접신 쩍 들러붙는 순간 천공을 틀어막은 벼랑을 천기누설죄에 봉할 것인가 왼손과 오른손, 갈빗살과 갈빗대를 끊어 노를 저은 하룻밤 행적은 수족이어서, 한 몸의 동의어라서 내 배꼽 위에 방사된 언어들로 나는 영영 블라우스 단추를 여밀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거라
-계간 <미네르바>2009년 여름호
조유리 시인 / 사바사나(Shayasana)
죽음을 개었다 다시 펼 수 있나 깔았다 다시 개어 윗목에 쌓아두고
목숨을 되새김질해 보는 체위 숨골이 열리고 닫히는 허구렁에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나로부터 나 조금 한가해지네
감은 눈꺼풀을 디디며 천장이 없는 사다리가 공중을 빗어 올리고
목덜미로 받아 낸 악장의 형식으로 죽음을 게송 해도 되는 건가 백 개의 현을 건너 걸어나간 먼 저녁이 되어
이 세상 계절을 다 물리고 나면 어느 사지에 맺혀 돌아오나 다시 누구의 숨을 떠돌다 바라나시 강가(Ganga)에 뛰어드는 바람이 되나 뜬 듯 감은 듯 어룽어룽 펄럭이는 눈꺼풀이 산투르 가락을 연주하는 동안
어제 아침 갠 이부자리가 내 숨자락을 깔고 기웃기웃 순환하는 동안
-웹진 『문장』 201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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