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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희 시인 / 내가 홀로 있는 방식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8.

이문희 시인 /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희고 느린 꿈을 꾸는 중예요 아마도 이 꿈은 때죽나무 꽃 위에 내릴 것 같아요 한낮이 붉게 차갑다가 밤엔 눈보라같이 뜨거워져요 눈동자에 여행자의 짐을 많이 실어서 실명할거라는데요 물푸레 그네에서 분홍 토끼가 일러주었죠 늙은 괘종시계는 거꾸로 서서 손뼉을 열두 번 쳤고요 난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책 읽는 버릇이 있죠 오늘은 무지개를 싹둑 잘라 책날개에 붙였어요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라는 페이지를 멈춰요

 

 심장을 켜면 음악이 흐르는 노란 시를 쓸 겁니다 언덕 위 벽돌집으로 와서 읽어줄래요? 변덕스런 난 마당가 맨드라미를 닮았대요 난쟁이 할머니가 알려 줬어요 두 가지 꽃이 피는 나무에서 내가 태어났는데 그러니까 내가 우울한 것도 검정양산만 쓰고 다니는 것도 저 복사꽃 때문인 걸요 자꾸만 달아나려는 마음을 긴 손가락으로 움켜잡아요 멀리 가지 못하게 발뒤꿈치를 깎았어요 누군가 밟고 다닌 그림자 같은 나를 깨워줘요 셋 둘 하나 꿈에서 뛰어내려요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이문희 시인

전북 전주에서 출생.  2015년 《시와 경계》신인우수작품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전라북도 산천은 노래다』(전북문화관광재단 공저, 2018)와 『맨 뒤에 오는 사람』(현대시, 2021)이 있음. 2021년 전북문화관광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전북시인협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