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남 시인 / 귀가 자라는 집
아래층에 이사 온 여자가 소리를 수거해 가기 시작했다 무심히 낭비한 소리가 귓바퀴에 가파르게 쌓이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목조목 파냈다 그녀가 건넨 소음 목록에 dB(데시벨)로 표기한 발꿈치가 콩콩 뛰어다녔다 한 살 터울 쑥쑥 크는 발목 묶어놓고 바닥이 종일 진땀을 뺐다 집안 대소사가 있던 날 왁자한 웃음소리마저 목록에 추가됐다 인터폰 소리를 제일 싫어하는 바닥이 공학적 히스테리에 빠진 타코마* 다리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위층과 아래층 사이엔 천장만 남았다 소심한 고양이도 발꿈치를 들고 걷는다
*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 해협에 놓인 840m 현수교,
성명남 시인 / 아버지, 고래
말이 없었던 아버지는 저녁이면 한 마리 고래가 됐다 단골집이 있을 법도 한데 늘 왁자지껄한 낯선 바다를 찾는 아버지 왼쪽 팔뚝에 새겨진 푸른 고래가 이리저리 뛰어오르고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는 아버지를 단박에 찾아냈지만 선뜻 부르지 못했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로부터 정박을 강요받은 탓에 역마살이 꼈다던 아버지 생은 말문을 닫아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면 바다를 다 회유한 아버지가 날 발견하고는 넓은 품에 안아 올려 함께 빙빙 돌았다 비릿한 바다 냄새 같은 아버지의 일대기가 내 유년의 바다를 만들고 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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