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숙 시인 / 도배장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8.

정숙 시인 / 도배장이

 

 

왜 벽만 보이는 걸까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설 때마다

활짝 웃는 장미꽃무늬 벽지를 바른다

간혹 다 떼어내지 못한 가시발톱이

줄을 세우기도 하지만

무작정 그 위에 연꽃 도배지를 눌러 바른다

삶이 뿌리는 저 검은 그림자들

앞을 보나, 뒤돌아보나 벽이 길 막고 서 있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 애증과

꽃과 꽃가시 사이

해맑은 웃음과 눈물 사이

모든 틈새에 벽지를 발라 위장해야 한다며

없는 벽, 쌓기도 하는 난 허술하고도

시시한 시, 도배장이

 

-시집 <연인 있어요> / 시산맥, 2020

 

 


 

 

정숙 시인 / 우포늪에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푸우욱 썩어 늪이 되어 깊이 깨달아야 겨우

작은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리라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일억 사오천 만 년 전 낙동강 한 줄기가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분명히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제 속에 썩혀서 어느 세월엔가

연꽃 한 송이 꽃피울 꿈을 꾸었던 것이다

조상의, 제 조상의 뿌리를 간직하려고

원시의 빗방울은 물이 되고

그 물 다시 빗방울 되어 떨어져 물결 따라

흘러가기를 거부한 늪은, 말없이

흘러가기를 재촉하는 쌀쌀맞은 세월에

한 번 오지게 맞서 볼 작정을 했던 것이다

때론 갈마바람 따라 훨훨 세상과 어울리고저

깊이 가라앉아 안슬픈 긴긴 밤이었지만

세월을 가두고

마음을 오직 한 곳으로 모아

끈질긴 가시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뚫어

오바사바 세월들이 썩은 진흙 구덩이에서

사랑홉는 가시연꽃 한 송이 피워내고 만 것이다

 

 


 

정숙 시인

경북 경산에서 출생. (본명: 정인숙) 경북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3년 계간 《시와 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신처용가』, 『위기의 꽃』, 『불의 눈빛』, 『불의 눈빛』,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등을 출간. 대구문학아카데미 현대시 창작반 강의. 현재 현대불교문인협회 대구경북지회장,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작가회의 이사, 시와시학동인회 부회장. 2010년 1월 제1회 만해님시인상 작품상 수상. 2015년 12월 23일 대구 시인 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