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시인 / 길 위의 피아노 - 은유에게*
골짝 물소리가 희다 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연둣빛 고기때들, 물살에 따라 휘어진다
별은 뜨겁고 노래는 길다
갓 낳은 달걀 같은 하루가 내 손을 잡는다 노래가 있어 고맙다 너가 있어 고맙다
노래는 생의 기쁨, 생의 고통 별은 어둠이 있어야 빛나는 법
짙은 눈썹의 왜가리 한 마리 먼 숲을 사무치게 바라보는 아침 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
* 2008년 생으로 올해 13세, 필자의 손녀 현재 독일 퀼른 음악대학 영재학과 피아노 재학 중
김성춘 시인 / 물소리 천사-그의 全身은 물이었다
물소리 하나 이승을 떠났다 물소리가 새 한 마리와 잘 놀다 떠났다
푸르고 싱싱한 물소리 불일암(佛日庵)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하도 입구에도 버스 정류장 근처에도 뒷골목 동네가게 앞에서도 그 물소리 또렷하게 잘 들렸다
이승을 떠나는 물빛 옷자락 사이로 물소리와 새소리가 잘 보였다
흰 맨발 뒤집어 보이며 하얀 덧니 반짝이며 숲속에서 살랑이는 나뭇잎의 몸짓으로 푸르고 싱싱한 물소리 가난한 사람들의 뿌리를 적시고 또 적셨다
물소리 하나 난초 꽃 향기로 가득한 봄날 온 들녘이 한창 눈부시다
김성춘 시인 / 나는 가끔 빨간 입술
새벽 테이블, 붉은 사과 한 알 향기롭다 과즙으로 충만한 부푼 가슴 하나의 붉은 벼랑이다 어디선가 저 붉은 열매 본 기억이 있다 나는 빨간 사과가 필요하지만 가끔 빨간 입술도 필요하다* 어디선가 저 뜨거운 언덕을 만난 기억도 있다 만나서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사과들, 향기롭고 둥근 것만이 아니다 사과를 오오래 들여다본 자만이 안다? 한 알의 붉은 사과 그 벼랑이 가진 심연, 아무도 모른다 새벽 테이블, 향기로운 붉은 사과 한 알 벼랑 앞의 나 지금, 폭풍 전야다
*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의 글
김성춘 시인 / 울릉도 1-天附에서
아침 밥상 앞에 수평선이 척, 걸쳐 있다 괭이갈매기들이 흰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울릉도엔 사람들보다 괭이갈매기들이 더 많다 오징어 배보다 섬말나리꽃들이 더 많다
송곳봉이 하늘에 떠 있다 코끼리섬이 우두커니 서 있다 딴 섬이 눈 감고 명상중이다
울릉도 사람들은 죽으면 섬을 떠날 수 없어 괭이갈매기들이 되나 봐 섬말나리꽃이 되나 봐 푸른 수평선이 되나 봐
사람들 모두 바다로 나갔는지 섬이 조용하다
김성춘 시인 / 달, 소스라치다
첨성대 앞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푸른 유방 사이로 유리 구슬이 밤을 내려다본다. 둥글게 밤은 푸르고 사랑의 시간도 푸르다
달밤은 언제나 추억처럼 둥글다
내물왕 부근 밤의 풀잎들 누가 떠나고 있는가 흰 옷의 풀잎들 누가 떠나고 있는가
첨성대 지나 내물왕릉 지나 유리구슬과 함께 걷는 밤 문득 푸른 유방과 유방 사이로 악, 소스라치는 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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