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 시인 / 도배장이
왜 벽만 보이는 걸까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설 때마다 활짝 웃는 장미꽃무늬 벽지를 바른다 간혹 다 떼어내지 못한 가시발톱이 줄을 세우기도 하지만 무작정 그 위에 연꽃 도배지를 눌러 바른다 삶이 뿌리는 저 검은 그림자들 앞을 보나, 뒤돌아보나 벽이 길 막고 서 있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 애증과 꽃과 꽃가시 사이 해맑은 웃음과 눈물 사이 모든 틈새에 벽지를 발라 위장해야 한다며 없는 벽, 쌓기도 하는 난 허술하고도 시시한 시, 도배장이
-시집 <연인 있어요> / 시산맥, 2020
정숙 시인 / 우포늪에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푸우욱 썩어 늪이 되어 깊이 깨달아야 겨우 작은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리라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일억 사오천 만 년 전 낙동강 한 줄기가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분명히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제 속에 썩혀서 어느 세월엔가 연꽃 한 송이 꽃피울 꿈을 꾸었던 것이다 조상의, 제 조상의 뿌리를 간직하려고 원시의 빗방울은 물이 되고 그 물 다시 빗방울 되어 떨어져 물결 따라 흘러가기를 거부한 늪은, 말없이 흘러가기를 재촉하는 쌀쌀맞은 세월에 한 번 오지게 맞서 볼 작정을 했던 것이다 때론 갈마바람 따라 훨훨 세상과 어울리고저 깊이 가라앉아 안슬픈 긴긴 밤이었지만 세월을 가두고 마음을 오직 한 곳으로 모아 끈질긴 가시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뚫어 오바사바 세월들이 썩은 진흙 구덩이에서 사랑홉는 가시연꽃 한 송이 피워내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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