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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재섭 시인 / 적막한 사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8.

전재섭 시인 / 적막한 사랑

 

 

너는 뒤란에 핀 목마른 나의 여인이었으니

산사의 풍경소리마저 잠들어 적막에 깃든 밤에

우리는 이끼 낀 천년석등에 초록불 밝히고

물소리로 점점 깊어져서

저문 강을 건넌다

 

우리의 숨은 사랑이

찬 서리 내리는 겨울밤 초록별로 떠서

새벽 동종소리를 듣고 있다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을 날다가

동트는 아침 어느 척박한 대지에서라도

씨앗이 발아해

수종사 석등 아래 흰눈이 푹푹 쌓이는 밤

겨울 동종소리로 목청껏 울고 싶다

 

 


 

 

전재섭 시인 / 나는 처음부터 남루였다

 

 

남루가 되고나서야 별이 보인다고 어느 시인이 말한다

가난한 소년시절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서 바라보던

밤하늘의 별들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아파트 공사장 함바집에서 물지게를 지며

비계목 위에 누워서 바라보는 별들도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인왕산 홍제동 산동네 단칸방,

남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 얹혀살던 소년시절

1평 마당에서 바라보는 별들도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신혼 초, 김치 깍두기 1쪽에 밥 한 그릇

아내가 차려준 밥상은 별빛처럼 아름다웠다

아파트 남쪽 베란다 창가에서 아내가

지난 가을 텃밭에서 수확한 호박을 주렴처럼 매달고 있다

펑퍼짐한 엉덩이 도톰한 손가락 틈새로

열사홀 달빛이 들어온다

붉은 호박 속살이 달빛에 반사되어 별빛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처음부터 남루였다

 

 


 

 

전재섭 시인 / 장수하늘소의 전설 1

 

 

6살 어린 소년의 눈에 눈물이 젖고 있습니다.

단독이 온몸을 뱀처럼 감고 생명을 빨고 있습니다.

기침이 끊이질 않고, 가슴을 물어뜯어 목구멍을 타고

핏물이 흐릅니다. 숨소리 점점 가늘어지며

떡을 먹고 싶은 소년이 울고 있습니다.

읍내에 있는 떡집과 병원은 그림 속에 있습니다.

 

울다 잠이 든 소년이 뒷동산 참나무에 올라가 참나무 진을 빨고 있는

장수하늘소를 어루만지자 소년은 장수하늘소로 변하고

그 주위를 풍뎅이들이 춤추며 돌고 있습니다.

장수하늘소가 된 소년은 숲을 돌아 계곡을 넘어 푸른 하늘을 납니다.

하늘 높이 날아홀라가 반짝이는 초록별을 잡으려는 순간,

몸은 다시 소년으로 변하고 천둥 속에 끝없는 추락.......

 

달도 없는 어스름 속에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장정이 찾아옵니다.

소년은 집을 한 바퀴 돌고 당산나무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그들을 따라갑니다.

마을을 벗어나 시퍼런 강물이 넘쳐흐르는

강물 위의 조그만 외길을 걷고 있습니다.

외길을 지나고 끝없는 모랫벌을 지나자

황량한 버드나무 숲길, 길은 점점 좁아지고

길이 끝나는 지점은 끝없는 암흑

 

소년은 칠흑의 허공으로 빨려 듭니다.

순간, 암흑은 걷히고 북, 장구, 꽹과리, 오색 깃발 아래 풍악이 울리고 있습니다. 소년이 잠깐 바라보다가 한밤중 병원 복도 같은 스산한 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황토빛 옷을 입은 표정 없는 여인이 빛바랜 장부를 들여다보다가 이름을 묻고는 다시 풍악이 울리는 곳으로 보내줍니다.

 

북을 치던 사람이 등을 떠밀자 어스름 등잔불 아래 어머니의 손에 든 시루떡 하나가 눈물에 젖고 있습니다. 소년의 두 눈이 어머니의 눈물에 젖고 있습니다.

 

오늘 밤도 장수하늘소가 뒷동산 참나무 숲을 돌고 있습니다.

풍뎅이가 장수하늘소 주위를 춤추며 돌고 있습니다.

 

- 전재섭 시집 <전설>에서 발췌

 

 


 

전재섭 시인

1996년 《시조문학》으로 천료(시조). 《정신과 표현》으로 등단(시). 현재 『시와 세계』 시학회장. 2012년 화백시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정책개발학회 부회장(행정학박사). 이상시문학상 운영위원. 『내일의 시』 문학회 회장. 행정공제회 홍보대사. 서울시립대학교 겸임교수, 경복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