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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성춘 시인 / 길 위의 피아노 - 은유에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7.

김성춘 시인 / 길 위의 피아노 - 은유에게*

 

 

골짝 물소리가 희다

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연둣빛 고기때들, 물살에 따라 휘어진다

 

별은 뜨겁고 노래는 길다

 

갓 낳은 달걀 같은 하루가

내 손을 잡는다

노래가 있어 고맙다 너가 있어 고맙다

 

노래는 생의 기쁨, 생의 고통

별은 어둠이 있어야 빛나는 법

 

짙은 눈썹의

왜가리 한 마리

먼 숲을  사무치게 바라보는 아침

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

 

* 2008년 생으로 올해 13세, 필자의 손녀 현재 독일 퀼른 음악대학 영재학과 피아노 재학 중

 

 


 

 

김성춘 시인 / 물소리 천사-그의 全身은 물이었다

 

 

물소리 하나 이승을 떠났다

물소리가 새 한 마리와 잘 놀다 떠났다

 

푸르고 싱싱한 물소리

불일암(佛日庵)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하도 입구에도

버스 정류장 근처에도

뒷골목 동네가게 앞에서도 그 물소리

또렷하게 잘 들렸다

 

이승을 떠나는

물빛 옷자락 사이로

물소리와 새소리가 잘 보였다

 

흰 맨발 뒤집어 보이며

하얀 덧니 반짝이며

숲속에서 살랑이는 나뭇잎의 몸짓으로

푸르고 싱싱한 물소리

가난한 사람들의 뿌리를

적시고 또 적셨다

 

물소리 하나

난초 꽃 향기로 가득한 봄날

온 들녘이

한창 눈부시다

 

 


 

 

김성춘 시인 / 나는 가끔 빨간 입술

 

 

새벽 테이블, 붉은 사과 한 알 향기롭다

과즙으로 충만한 부푼 가슴

하나의 붉은 벼랑이다

어디선가 저 붉은 열매 본 기억이 있다

나는 빨간 사과가 필요하지만

가끔 빨간 입술도 필요하다*

어디선가 저 뜨거운 언덕을 만난 기억도 있다

만나서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사과들, 향기롭고 둥근 것만이 아니다

사과를 오오래 들여다본 자만이 안다?

한 알의 붉은 사과

그 벼랑이 가진 심연, 아무도 모른다

새벽 테이블, 향기로운 붉은 사과 한 알

벼랑 앞의 나

지금, 폭풍 전야다

 

*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의 글

 

 


 

 

김성춘 시인 / 울릉도 1-天附에서

 

 

아침 밥상 앞에

수평선이 척, 걸쳐 있다

괭이갈매기들이

흰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울릉도엔

사람들보다 괭이갈매기들이 더 많다

오징어 배보다 섬말나리꽃들이 더 많다

 

송곳봉이 하늘에 떠 있다

코끼리섬이 우두커니 서 있다

딴 섬이 눈 감고 명상중이다

 

울릉도 사람들은 죽으면

섬을 떠날 수 없어

괭이갈매기들이 되나 봐

섬말나리꽃이 되나 봐

푸른 수평선이 되나 봐

 

사람들 모두 바다로 나갔는지

섬이 조용하다

 

 


 

 

김성춘 시인 / 달, 소스라치다

 

 

첨성대 앞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푸른 유방 사이로

유리 구슬이 밤을 내려다본다. 둥글게

밤은 푸르고

사랑의 시간도 푸르다

 

달밤은 언제나 추억처럼 둥글다

 

내물왕 부근 밤의 풀잎들

누가 떠나고 있는가

흰 옷의 풀잎들

누가 떠나고 있는가

 

첨성대 지나 내물왕릉 지나

유리구슬과 함께 걷는 밤

문득

푸른 유방과 유방 사이로

악,

소스라치는 저

달!

 

 


 

김성춘 시인

1942년 부산에서 출생. 1974년 《심상》 신인상에 〈바하를 들으며〉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방어진 시편』 『섬, 비망록』 『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 등. 한국문협울산지부장과 경남문협부지회장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국제펜클럽울산펜회장. 울산대 시창작학과 주임교수. 경상남도문화상수상, 제1회 울산문학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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