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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명남 시인 / 귀가 자라는 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0.

성명남 시인 / 귀가 자라는 집

 

 

아래층에 이사 온 여자가

소리를 수거해 가기 시작했다

무심히 낭비한 소리가

귓바퀴에 가파르게 쌓이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목조목 파냈다

그녀가 건넨 소음 목록에

dB(데시벨)로 표기한 발꿈치가 콩콩 뛰어다녔다

한 살 터울 쑥쑥 크는 발목 묶어놓고

바닥이 종일 진땀을 뺐다

집안 대소사가 있던 날

왁자한 웃음소리마저 목록에 추가됐다

인터폰 소리를 제일 싫어하는 바닥이

공학적 히스테리에 빠진 타코마* 다리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위층과 아래층 사이엔 천장만 남았다

소심한 고양이도

발꿈치를 들고 걷는다

 

*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 해협에 놓인 840m 현수교,

 

 


 

 

성명남 시인 / 아버지, 고래

 

 

말이 없었던 아버지는

저녁이면 한 마리 고래가 됐다

단골집이 있을 법도 한데

늘 왁자지껄한 낯선 바다를 찾는 아버지

왼쪽 팔뚝에 새겨진 푸른 고래가

이리저리 뛰어오르고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는 아버지를

단박에 찾아냈지만 선뜻 부르지 못했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로부터 정박을 강요받은 탓에

역마살이 꼈다던 아버지 생은

말문을 닫아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면

바다를 다 회유한 아버지가 날 발견하고는

넓은 품에 안아 올려 함께 빙빙 돌았다

비릿한 바다 냄새 같은 아버지의 일대기가

내 유년의 바다를 만들고 있다

아.버.지.

 

 


 

성명남 시인

세종특별시 출생. 2012년 《국제 신문》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으로『귀가 자라는 집』(2015 한국문연)이 있음. 2016년 세종도서 선정.